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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神戰) -4~지금까지
작성자   대털 작성일 2014-07-06 11:26:04 (조회 : 2,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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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앞에서 청년들과 에이가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중 하나가 다 꺼져버린 벽난로의 불씨를 뒤적거렸다.

“제길, 전부 눅눅해졌잖아.”

“장작뿐만 아니야. 계속되는 홍수로 문짝이나 마루 할 것 없이 삐걱대고 있다고.”

청년들은 불평했다. 모두들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제대로 씻지 못한 게 벌써 며칠째 인지 모르겠군.”

비가 옷에다 코를 박고 킁킁대며 말했다.

“참 우습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난리인데 정작 씻을 물이 없다니 말야.”

디가 쇼파에 털썩 기대며 말했다.

“마실 물도 얼마 안 남았어. 배급도 끊긴지 오래고. 아마도 마을끼리 잇는 다리가 범람한 모양이지.”

“큰일이군. 이대로 가다가는 전부 굶어 죽겠어.”

씨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제이!”

가만히 앉아있던 에이가 계단을 내려오는 제이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케이는 어때?”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비가 역정을 냈다.

“그놈의 자식!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힘든 시기일수록 힘을 합쳐야 하는데!”

비가 일어나서 계단을 오르려 했다. 제이는 말렸다.

“그만둬. 굉장히 불안한 상태야.”

“혹시 저 때문인가요? 제가 부주의해서…….”

에이가 제이에게 물었다.

“아니, 그치만 당분간 케이에게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같은 나이끼리 존댓말은 이제 그만둬.”

에이는 흠칫 놀라서 한걸음 물러났다.

“케이가 또 에이 탓을 한 거야? 이놈을 정말!”

“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내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서 일해야 해. 어서 잠자리에 들자.”

쿵쿵

모두의 시선이 현관을 향했다.

“누구지? 이 시간에…….”

비가 현관문 쪽으로 다가섰다.

*

케이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을 청했지만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였다.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앉았다. 주먹을 들어 힘껏 다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망할 다리! 이놈의 다리!”

케이의 다리는 태어나서부터 쓰지 못했다. 외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의사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이놈들! 듣고 있냐!”

케이는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방안에는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사람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너희는 신이라고 뻐기고 있겠지? 웃기지 마라! 불벼락형이라도 내리려면 내려라! 이렇게 사느니 그 편이 편할 것 같다!”

케이는 오열했다.

“이렇게 사느니…….”

케이는 침대 옆에 놓인 나이프를 쳐다보았다.

*

비가 현관문을 열었을 때 후드를 뒤집어쓰고 비를 흠뻑 맞은 두 사람이 서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가 알지 못하는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누구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두 사람은 비를 맞고 가만히 서 있었다. 비가 한걸음 다가서서 얼굴을 확인하려고 시도했다. 약간 앞쪽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손을 뻗었다. 비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이어 디가 상황을 파악하려고 다가섰다. 후드가 손 방향을 디쪽으로 돌렸다. 이번에는 디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이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에이는 다리의 힘을 잃고 마루에 주저앉았다.

“케이?”

후드의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케이?”

후드의 질문이 에이를 향했다. 에이는 덜덜 떨며 손가락으로 2층을 가리켰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두운 방안이라 무슨 일이 난지는 알 수 없었다. 케이는 바라보던 나이프를 손에 쥐고 문 쪽을 겨눴다. 어두운 두 그림자가 케이의 침실로 들어섰다. 케이는 나이프를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케이?”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을 한 후드가 옆에 있는 키 큰 후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후드가 손을 내밀자 케이의 몸이 옴쌀 달싹 하지 못했다. 나이프도 떨어뜨렸다. 키 큰 후드가 천천히 케이에게로 다가왔다. 걸어왔다기 보다는 물위를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케이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온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그러자 케이의 오른발이 덜컥 하고 움직였다. 키 큰 후드가 케이의 움직인 다리를 휙 하고 쳐다보았다. 그리곤 작은 후드를 바라보았다. 작은 후드는 내밀고 있는 손을 다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문을 모른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케이였다. 케이는 평생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오른다리를 수상한 두 명의 후드보다 더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키 큰 후드가 작은 후드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작은 후드는 체념한 듯이 나머지 한 손도 케이를 향했다. 케이의 몸이 거칠게 떠올라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는 벽에 못 박힌 듯 매달렸다. 키 큰 후드가 케이를 향해 다가섰다. 키 큰 후드가 다가서는 동선에 무엇인가 날아왔다. 키 큰 후드는 반대쪽 벽을 바라보았다. 금빛 화살이 벽에 박혀 깃을 흔들고 있었다. 큰 후드가 창문을 향해 휙 돌아섰다. 창문에는 화살 크기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유리의 금이 조금씩 늘어나 어느새 창문 전체를 뒤덮었다. 와장창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백발의 이카루스가 들이닥쳤다. 키 큰 후드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군.”

“황금마차를 더 일찍 꺼냈어야 했어요.”

창문 밖에서 에로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떠있었다. 이카루스는 케이와 큰 후드 사이에 섰다. 케이는 벽에 부딪히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이카루스는 키 큰 후드를 노려보았다.

“이런 썩을 놈들. 각오는 단단히 되었겠지?”

이카루스의 몸이 불그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이카루스의 머리칼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열풍으로 휘날렸다. 키 큰 후드는 두 손을 후드 바깥으로 꺼내었다. 양 손에서 한 뼘도 넘는 긴 손톱이 솟아났다.

“누군가 했더니 재규어로군. 하긴, 네놈들의 생각이 그 정도지.”

이카루스의 눈빛이 변했다. 이카루스 주변의 불그스름한 불빛이 강렬히 번쩍였다. 방안은 맑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열풍이 온 방안을 감쌌다. 바람에 재규어의 후드가 벗겨졌다. 남색 머리카락을 하고 송곳니가 입 바깥으로 솟아 있었다.

“고양이 새끼 사냥 시작이다. 에로스.”

에로스는 활시위를 당겨 재규어를 향해 쏘았다. 재규어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눈치가 빠른데? 이 화살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구만.”

에로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재규어를 향해 말했다. 화살은 재규어의 뒤에 있는 벽에 박혔다. 벽은 화살을 중심으로 온 방향으로 금이 가 있었다. 처음에 박혔던 화살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에로스에 이카루스라니, 제우스도 단단히 맛이 갔군.”

이카루스는 어느 샌가 다가와서 재규어의 목을 잡고 벽에 밀쳤다. 재규어는 켁 소리를 냈다.

“고양이 주둥이에서 나올 이름이 아닌데?”

재규어는 목을 잡힌 체 킥킥거리며 웃었다.

“큭, 그따위 예언을 믿다니 우리 쪽도 너희 쪽도 너무 오래 싸워서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지 않냐?”

이카루스는 목을 잡은 팔에 힘을 실었다. 재규어는 괴로운 듯 혀를 내밀었다. 이카루스 주위에서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벽의 균열도 한층 굵어졌다.

“이카루스님, 건물이 무너지겠어요.”

에로스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오며 말했다. 이카루스는 팔의 힘을 조금 뺐다. 재규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톱으로 이카루스의 팔을 난도질 하고 멀리 벗어났다. 이카루스의 팔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더러운 고양이새끼가 사람을 할퀴다니…….”

“이카루스님, 예언의 인간 확보부터!”

이카루스는 케이 쪽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케이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체였다. 에로스가 다가서서 케이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케이는 벽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용없다.”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이카루스와 에로스는 급히 돌아섰다.

“이 목소리는…….”

작은 후드는 두 손을 케이 쪽으로 향해놓고 있었다. 재규어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에 나 혼자 보냈을 것 같으냐?”

작은 후드는 아기 같은 목소리로 키득댔다.

“미다스!”

미다스는 한 손을 천천히 케이에게서 떼어냈다. 케이는 침대로 떨어졌다. 미다스는 손을 벽에 박힌 화살 쪽으로 향했다.

“에로스, 네놈의 화살은 이 것 하나겠지?”

이카루스가 놀란 듯 외쳤다.

“에로스! 화살을 회수해!”

에로스는 급히 손을 등 뒤에 메달아 놓은 화살 통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던 화살 통에 화살 한 개가 에로스의 손에 잡혔다.

“아주 똑똑한 걸?”

미다스는 한손을 다시 케이에게 향했다. 케이는 침대위로 붕 떠올랐다. 미다스는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케이는 빠른 속도로 미다스 앞으로 날아왔다.

“예언의 인간 확보.”

미다스와 재규어는 깔깔거리며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이카루스가 쫓아가려는 행동을 취했다.

“이카루스님!”

에로스는 다급히 이카루스를 찾았다.

“아래층에 인간이…….”

이카루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추어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떨고 있었다.

“이런!”

이카루스는 정지한 두 사람을 살피었다.

“미다스의 짓이다. 직접 손을 대지는 않은 것 같다.”

에로스는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듯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미다스가 누구입니까?”

“그놈의 손은 위험하다. 만일 그 놈의 손에 닿게 되면…….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 이 두 사람을 어서 신전으로!”

제이는 대답했다.

“이 마을에는 신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도 좋다.”

“교회도…….”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교회도 없다니?”

“오 년 전쯤 주민들의 반대로 폐쇠했습니다. 터는 남아있을겁니다.”

에이가 가까스로 일어나서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두 사람을 부축하라.”

제이와 에이가 비와 디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비와 디는 돌처럼 딱딱했다.

“오 년 전이라면 휴전 직후가 아닌가? 이놈들이 그때부터 손을 썼단 말인가!”

이카루스의 몸에서 다시 작게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제이의 웃옷이 펄럭였다.

“잠깐!”

에로스가 제이의 웃옷을 올렸다. 제이의 등에는 큰 십자가 문신이 있었다.

“너 이 문신이 언제부터 있었지?”

“태어날 때부터입니다.”

제이는 옷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이카루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언의 인간, 찾았다.”

*

케이는 덜컹거림에 눈을 떴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에 실려 옮겨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일어나 앉으려고 했으나 등허리의 통증이 심각했다. 끄응 신음소리를 내니 옆에 있는 커튼이 휙 하고 열렸다.

“정신이 들었나 보군.”

재규어가 옆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세요? 신?”

재규어는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마침내 터뜨렸다.

“푸하하. 그래 비슷한 존재지. 마차안은 편안한가?”

케이는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빛이 은은하게 마차안을 비추었다. 시커먼 나무로 만들었지만 결코 오래되지는 않아 보였다. 케이는 가만히 마차 마루를 쓰다듬었다.

“아주 질이 좋은 나무다. 다크 트리라고 하지. 이 세계에는 아마 없을걸?”

이 세계라니? 케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들은 신이 맞군요? 제가 신에 대해 저주를 퍼부어서 나를 불벼락형에 처하려고 하는 건가요?”

재규어는 또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이카루스와 에로스를 보기전에 기절했나 보군. 그렇다곤 해도 말이야.”

재규어의 표정이 빠르게 심각해졌다.

“신을 저주하다니?”

케이는 순간 움츠려들었다.

“이렇게 사느니 불벼락형이 낫다고 독설을 퍼부었거든요.”

“그렇게 사는 것이 어때서? 요즘 같은 세상에 인간만큼 속편한 것들이 또 있나?”

케이는 다리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움직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쓰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도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것 같고, 마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리를 못 쓰다니? 너 미다스의 제어에도 움직이지 않았나?”

케이는 그것이 잘못 본 것이 아님에 약간 안도했다.

“저도 몰라요. 무슨 영문인지.”

“흠, 그것 참 이상하군. 무슨 저주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만일, 저주가 미다스의 능력으로 인해 어떤 조건을 충족했다면…….”

“잡담은 거기까지다.”

미다스의 아기같은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렸다. 케이는 힘겹게 앞쪽의 커튼을 열었다. 미다스는 말을 몰고 있었다.

“집이 눈앞이다.”

미다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케이는 모든 커튼을 열었다. 창밖은 달빛이 아주 밝은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는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어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케이가 타고 있는 마차는 경악할만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케이는 놀라서 앞을 보았다. 멀리서 작은 문이 보였다.

*

“내려라.”

재규어는 말에서 내리며 케이에게 말했다.

“내릴 수가 없어요.”

재규어는 남색 머리를 긁적이고는 케이는 안아 내렸다. 미다스는 작은 문에 손을 대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케이는 문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문은 나뭇장으로 되어 있고 검은색 문고리와 검은색의 노크를 할 수 있는 뱀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문 옆에 벽은 없고 허허벌판에 문 하나만 덜렁 떠 있는 모양새였다. 열려 있는 문 안쪽은 시커멓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 뒤쪽이 뚫려 있나 보고 싶었으나 재규어의 품에 안겨 있었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미다스가 먼저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갔다기 보다는 들어서기 직전에 빨려들어간 느낌이었다. 문이 덜컥 하고 부자연스럽게 닫혔다. 이번에는 재규어가 다가가 문에 손을 대었다. 정확히는 노크 장식을 붙잡았다. 재규어는 노크를 열 한번을 하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미다스가 말했던 것 과는 또 다른 내용인 것 같았다.

케이는 재규어가 중얼거리는 동안 뱀 모양의 노크 장식을 바라보았다. 검은 뱀 모양의 장식은 눈을 감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재규어가 중얼거릴 수록 서서히 눈을 뜨는 것 같았다. 케이는 오른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다. 뱀은 완전히 눈을 떠서 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뱀의 세로로 가파르게 서 있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의 귀에 샤아 하는 뱀 울음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케이는 뱀이 입을 크게 벌려 자신을 집어 삼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순간 그는 이미 문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제이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예언의 인간이라니오?”

이카루스는 흰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이 마을 이 집에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듣질 못했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저인줄 아셨습니까?”

이카루스는 제이의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십자문신. 그것이 증거다.”

제이는 보이지도 않는 등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루엔하임의 동남쪽의 붉은벽돌집에 십자를 등에 진 사내가 산다. 그가 예언의 인간이다.”

이카루스가 말했다.

“이것이 헤라님의 전언이다. 다른것은 몰라. 우린 십자를 등에 진 사내만 찾아서 데려가는 임무만 알 뿐.”

“이 곳입니다.”

에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에이의 손이 가리킨 방향에는 방치된지 몇 년은 되어 보이는 부서진 울타리가 있었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 터로 올라가려면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제이는 두 사람을 부축하며 계단을 오르려고 애썼다. 그러나 제 아무리 건장한 체격의 제이라도 돌처럼 단단히 굳어진 비와 디를 혼자서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기는 무리였다.

“윽!”

제이가 디딘 돌계단이 우수수 부서졌다. 때문에 제이는 발을 헛디뎌 두 사람을 놓쳤다.

“안돼! 그 두 사람에게 충격이 가해져선 안된다! 부서질거야!”

두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둥실 떠올랐다. 에로스가 두 사람을 가볍게 안아 날아서 터가 있는 계단위로 사뿐히 옮겼다. 에이는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방금 하늘을?”

제이가 물었다. 이카루스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심이 선 얼굴로 대답했다.

“저 녀석은 에로스. 들어본 적 없느냐?”

에이가 놀라서 물었다.

“에로스라면 신궁(神弓) 에로스?”

에로스는 어쩔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혔고 이카루스는 어이가 없는 듯 오른손을 이마에 툭 얹었다.

“신궁은 아폴로님이고……. 저놈은 사랑은 관장하는 에로스.”

에이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에로스는 내심 약간은 뿌듯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로스. 우리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은 놈들의 선동이 이미 뿌리깊게 내렸다는 뜻이다.”

이카루스의 타박에 에로스는 급히 표정을 거두고 두 사람을 교회 터 중앙으로 옮겼다.

“이카루스님, 준비가 되었습니다.”

“음.”

이카루스는 슬며시 제이와 에이를 지나쳐 교회 터 로 올라섰다. 제이는 그런 이카루스를 바라보다가 번뜩 생각이나 난듯이 말했다.

“이카루스……. 아폴로의 아들! 황금마차의 주인!”

이카루스는 거만한 표정으로 에로스를 바라보았다. 에로스는 이카루스 몰래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아버지에게 항상 주의를 받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인간세상에 물의를 일으킨 것이 자그마치 일곱 번! 또 황금마차로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 머리카락의 색이 타버려 잿빛 머릿칼을 가지고 있는…….”

이카루스는 간신히 화를 참는 표정으로 손으로 올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에로스는 배를 잡고 소리없이 깔깔대었다.

이카루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살피었다. 교회의 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황폐해져 있는 땅이었다. 바닥을 이루었던 벽돌이나 나무 따위는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잡풀만이 무성했다. 단지 부서진 울타리만이 이 곳에 무엇인가 있었다는 것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교회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 같았다. 무덤이었다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었다.

‘이 지경으로 관리가 안 되어있다니, 오년이 아니라 오천년은 버려진 땅 같구나!’

이카루스의 시선이 눕혀진 두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벌써 손가락 끝이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다들 물러서.”

에로스와 두 사람은 이카루스 뒤로 숨었다. 이카루스는 눈을 지긋이 감고 의식을 시작했다.

“대기에 숨쉬는 성스러운 영혼은 응답하라.”

이카루스가 말을 마치자 먹구름 사이에서 빛이 희미하게 비추었다.

‘이게 다인가? 어처구니가 없구나.’

“터를 지키던 기둥과 벽은 응답하라.”

푸른 불빛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모습이 드러났다. 벽돌 사이사이 틈 하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이루어진 웅장한 교회가 하늘을 찌를 듯 나타났다. 그러나 빛깔은 아주 희미해서 뒤쪽의 풍경이 투과되어 보였다.

“교회가 이렇게 컸었나?”

제이가 거대한 존재감에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에로스는 제이를 째려보았다. 제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 성령이 내리리라.”

교회 안쪽으로 자리하던 십자가에서 강렬한 빛이 배출되었다. 갈길을 잃은 빛은 여기저기를 마구잡이로 비추고 있었다. 이카루스는 가만히 손을 올렸다. 빛은 이카루스의 손으로 집중되었다. 이카루스는 손으로 두 사람을 조준했다. 빛은 이카루스의 손에서 두 사람으로 옮겨갔고 한 순간 크게 폭발했다. 터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벼락이 친 것 처럼 잠깐동안 밝혔다가 사라졌다. 비와 디의 굳어진 육체는 완전히 회복되어 바닥으로 축 처졌다.

“이것이 신의 힘인가.”

제이는 넋을 놓고 있었다. 이카루스는 긴장을 플고 한숨을 푹 쉬었다. 교회의 투명한 형상은 이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의 힘이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저 힘을 받아 넘겼을 뿐.”

이카루스는 터의 끄트머리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마을은 불빛하나 없이 캄캄했다.

“이 마을에 어둡고 습기가 가득하구나. 그들이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조건이다. 햇빛이 들지 않은지는 얼마나 되었나?”

에이는 대답했다.

“비가 내린지는 여드레째입니다만, 날이 흐려 햇빛이 비추지 않은지는 석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카루스님.”

에로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카루스를 불렀다.

“알고 있다. 이 문제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예언의 인간의 일이 끝나면 대대적으로 청소를 해야겠다.”

이카루스는 말을 마치고 손가락을 입에 물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 돌아갈 때는 바로 마차를 타고 갑니까?”

이카루스는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문제 있느냐?”

“아닙니다.”

에로스는 내가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성인 남성의 두배쯤 되는 키의 말 두 마리가 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말들은 터의 발을 디디고 있었으나 마차는 허공에 떠있었다.

“가자, 예언의 인간.”

이카루스는 제이에게 말했다. 제이는 뒷걸음 쳤다.

“어디로 말입니까? 저는 이 마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에이는 제이의 뒤에 숨어 제이의 윗옷깃을 꽉 붙잡았다. 이카루스는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다가 에로스를 한 번 슥 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에로스는 제이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시간이 없다. 잔소리 말고 올라타거라.”

제이는 속절없이 앞으로 끌려갔고, 에이는 그 무지막지한 힘에 꽉잡았던 옷깃을 놓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제이를 어디로 데려가시는겁니까? 행선지라도 말씀해주세요!”

에로스는 제이를 마차에 태우고 문을 닫기전에 잠시 서서 에이를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올림푸스.”

케이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지만 눈을 감았다. 재규어에게 안긴채로 문에 들어섰기에 지금도 필시 안겨있을 터인데, 전혀 촉감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끝없는 절벽에 한없이 몸을 던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감정은 불쾌하지는 않았다. 불쾌하기 보다는 오히려 본적도 없는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거기까지다.”

케이는 무엇인가에 부딪힌 느낌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케이는 살며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상태로 이 강을 건널 수 없다.”

귀 바로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말하는 소리였다. 강 이야기를 듣고나니 눈앞에 강이 보였다. 강이라기 보다는 바다와 같이 건너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건너편이 반드시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돌아가죠?”

케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번에도 귀 뒤쪽에서 들렸다.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강을 건너라.”

케이는 다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널수 없다고 하셨…….”

케이는 말을 하다말고 무엇인가 깨달았다.

“그렇다. 죽으라. 죽고서 건너오라.”

케이는 재규어에게 끌려오는 순간부터 죽을 것이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공포라는 이름의 낫이 케이의 목에 서늘한 느낌을 주며 겨누어졌다.

“불행하게도 허가가 내려졌다.”

등 뒤에서 재규어가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부터 재규어 품의 촉감이 느껴졌다. 케이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물었다.

“어, 언제부터?”

재규어는 한심하다는 듯이 케이를 바라보았다.

“난 널 한번도 놓은적이 없단다.”

“……. 강을 건너라.”

긴 침묵 끝에 들려온 목소리였다. 재규어의 품에 안겨있기에 등 뒤에는 재규어가 있는것이 분명함에도 목소리는 귀 뒤에서 들려왔다. 목소리를 마치자 주변의 어둠이 걷히고 시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고 밝은색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바다같았던 강은 뒷산의 개울보다도 못한 강으로 변해있었다. 재규어는 힘 한번 주고 훌쩍 강을 뛰어넘었다. 이번에는 건너온 뒤쪽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루비콘강을 건너신 소감이 어떤가? 흐흐흐.”

재규어는 끔찍하게 비웃었다. 케이는 앞으로 다시는 이 강을 건널 수 없을 거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재규어의 품에 안겨 길을 걷다가 거대한 문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미안하지만, 이 문은 네 손으로 열어줘야 되겠어.”

케이는 문을 바라보았다. 사람 열 명 높이도 더 되보이는 무식한 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벽도 기둥도 아무것도 없고 문만이 숲속에 덜렁 있었다. 케이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살며시 밀었다. 문은 놀랍게도 깃털같이 가벼웠다. 살짝 밀었을 뿐인데 거대한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감사, 이 문은 억지로 열려면 절대로 안열리거든.”

재규어는 뭐가 그리 재미난지 웃음을 실실 흘리며 장난스럽게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또다시 거대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재규어가 안고 있는 느낌또한 다시 사라졌다.

“허가 받은 자는 앞으로 나오라.”

음성이 들렸지만 전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들려오는 것도 아득히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친구는 걸을 수가 없어.”

재규어가 대신 한발짝 나가며 말했다. 재규어가 입을 떼자 다시 재규어의 느낌도 돌아왔고, 문안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오랫동안 어둠속에 있으면 눈이 적응하듯 서서히 가까운 곳부터 보였다. 바닥은 회색의 울퉁불퉁한 석조로 이루어져 있고 넓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중앙에 있는 거대한 협탁과 기둥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기에 더욱 넓게 느껴졌다. 협탁 뒤에는 하체가 없는 상반신 조각상이 피눈물을 흘리며 웃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짙은 초록빛의 긴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을 말하라.”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남자의 목소리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케이 알파벳.”

남자는 불현듯 협탁에 있는 거대한 책의 중간쯤을 쿵 하고 펼쳤다. 책의 크기는 케이의 키정도 였다. 남자는 얼굴을 책에 파묻고 미친듯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책이 찢어질 정도로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다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케이 알파벳, 열 네 살. 이 곳에 오려면 십 년하고도 오개월이 남아있다. 허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남자가 물었다. 물론 케이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수명이 이십대 중반까지였다는 사실을 되뇌이고 있었다.

“이녀석은 예언의 아이다. 허가는 이주알이 직접 내렸다.”

남자는 이주알의 이름을 듣자 미동은 없었으나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이주알은 인간계의 권한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텐데.”

“그 친구야 원래 제 멋대로니까.”

재규어는 낄낄거렸다. 초록빛 머리칼의 남자가 불편해 하는 것을 즐기는 것 처럼 보였다.

“하데스, 의식이 필요해. 좀 늦었거든.”

하데스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수명이 남아있는 인간에게는 의식을 할 수 없다. 균형이 무너진다.”

재규어는 웃음을 멈추었다.

“루시퍼가 기다린다.”

재규어가 차갑게 말했다. 이름을 말했을 뿐인데 주변의 공기조차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하데스는 말이 없었다.

“하데스!”

재규어가 소리쳤다. 짐승의 표효같은 목소리가 홀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메아리가 계속해서 하데스의 이름을 외쳤다.

“좋다. 순서는 엉망이지만, 십 년정도 앞당긴다고 붕괴하진 않겠지. 게다가 루시퍼가 기다린다니…….”

하데스는 협탁에 놓여있는 긴 깃펜을 뽑아들었다. 검은 잉크가 깃펜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깃펜은 하데스의 키보다 더 길었고 끝은 바늘보다 날카로웠다.

“제적!”

하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초록빛 눈동자가 한순간 번쩍번쩍 빛났다. 하데스는 깃펜을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검은 잉크가 온군데 흩날렸다. 이제보니 홀 군데군데 마른 잉크 자국이 가득했다. 하데스는 깃펜을 두손으로 고쳐잡고 이번엔 하늘위로 돌렸다. 잉크가 비처럼 홀 전체에 뿌려졌다. 하데스는 깃펜을 하늘에서 한 손으로 낚아채고 뛰어올라 온 몸을 회전시켜 날카롭게 깃펜을 휘둘렀다. 거대한 책에 아주 가는 실 선이 생겼다. 광경을 바라보던 케이의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재규어는 얼굴에 묻은 잉크자국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 좀 살겠군.”

재규어는 케이의 몸을 홀 바닥에 던지듯 떨어뜨렸다.

제이는 황금마차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차를 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루엔하임 마을은 까마득히 멀리 보였다. 그리고 마을을 가리고 있던 검은 구름의 정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루엔하임과 근처 몇 마을에만 짙은 검은 구름이 있고 근처 숲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은 쾌청한 날씨였다.

“이것이 그들의 수법이야.”

에로스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금빛 곱슬 머리카락의 에로스는 어딘가 모르게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나 몸이나 십대 중반정도의 골격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끝없는 불운을 주어서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지. 인간들은 날씨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에로스가 말을 끝내자 마차는 또 하나의 거대한 구름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번 구름은 두께가 엄청나서 한참동안을 흰 구름속을 달려야만 했다. 푹신한 침대들 사이로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곧 도착이다.”

이카루스가 앞 좌석에서 뒤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사방이 흰 구름인데 도착이라니?’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구름을 빠져나왔다. 제이의 눈에 보인 광경은 놀라웠다. 제이의 발밑에는 마차가 뚫고 나온 거대한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구름이라기 보다는 하얀 대지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정도의 크기였다. 마차가 지나온 자국은 조금 있다가 주변 구름으로 스르륵 덮혔다. 마차가 올라온 주변은 구름 한 덩어리 없이 새파란 하늘만 끝없이 있었다. 하늘색 보다 더 짙고 푸른 쪽빛의 가까운 색이었다. 마차가 달리는 방향의 끝에는 자그마한 건물 형상이 허공에 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올림푸스다.”

제이는 실례가 되는 질문이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렇게 조그맣나요?”

에로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조그맣다구? 저게?”

이카루스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떠들지 말고 잡을 수 있는 것은 꽉 붙잡아라.”

제이가 뭐라고 물으려다가 마차가 가속하는 바람에 입이 다물어졌다. 마차는 가공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이의 얼굴 피부가 뒤로 밀릴 정도로 극한의 속도였다. 제이는 느껴본 적 없는 속도감에 겁을 잔뜩 먹고 마차 옆문에 찰싹 매달렸다. 제이는 붙잡을 것을 찾아 안간힘 을 썼다. 그러다 제이는 문고리를 붙잡아 돌렸다. 문은 벌컥 하고 열렸고, 제이는 순식간에 바깥으로 빨려 나갔다. 마차는 제이를 떨어뜨리고 금방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제이는 공중에서 붕 뜬 채로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오, 하느님 맙소사!”

제이의 몸이 밑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제이의 몸이 구름 바닥에 닿기 전에 에로스가 나타나 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내 실수다 문을 잠그는 것을 잊었군.”

에로스는 등뒤로 큰 날개를 펄럭였다. 태양이 에로스의 등뒤를 비추고 있는지 에로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 나를 꼭 안으라구.”

제이는 에로스를 안간힘을 다해 안았다. 제이의 몸집이 훨씬 컸기에 보기는 우스꽝 스러웠다. 에로스는 날개를 펄럭이며 위로 떠올랐다. 에로스의 날개가 조금 다른 형상으로 변형했다. 이전은 비둘기의 날개였다면 지금은 제비의 날개처럼 변했다. 더 이상 펄럭이지도 않고 평평하게 펼쳐져서 바람을 타고 있었다.

“또 빨라질거야. 긴장해.”

에로스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속도를 높였다. 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속도는 마차의 배 이상이었다.

제이가 눈을 떴을때는 콩알보다 작아 보였던 올림푸스 신전의 입구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가까이 오니, 끔찍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 대문이 제이의 키에 몇십배는 될 정도였고, 대문 장식 하나하나에 정교한 장식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천사들이 나팔부는 모습, 용맹한 용사가 여러개의 머리를 한 뱀과 맞서는 모습, 몸통이 말의 형상을 한 전사가 활을 쏘는 모습등 빈틈없이 빽빽하게 대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온통 금빛이라 태양의 빛을 찬란히 반사하고 있었다.

제이가 넋을 놓고 있자 에로스는 제이를 두 손으로 양 겨드랑이를 들어 스스로 바닥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 작은 팔뚝으로 본인의 두 배이상 큰 제이를 가볍게 다루는 것이 놀라웠다. 바닥은 구름이 아니라 인공적인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이보리 색의 석재타일이 정갈하게 대문을 받치고 있었다. 대문의 약간 앞에만 석재타일이 있고 그 밖은 구름이었다. 제이는 날지 못하는 생물은 이 곳에 도착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이가 타일에 발을 딛자, 에로스는 제이에게서 손을 놓고 하늘로 솟아 올랐다가 한 바퀴 재주를 넘고 날개를 접었다. 날개를 그 크기를 자랑하듯 한 번 완전히 펴졌다가 수평으로 여러번 접혀서 최초의 에로스의 작은 날개로 돌아왔다. 에로스는 작은 날개를 벌레의 날개처럼 여러번 파닥이며 천천히 제이의 곁으로 내려섰다. 제이는 순간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가만, 이건 새로운 무게인데?”

제이는 흡사 천둥의 소리처럼 큰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귀를 막고 엎드렸다.

“손님이 오다니, 무게를 새롭게 맞춰야 겠군! 바빠지겠어!”

목소리는 바닥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에로스는 타일 밑으로 휙 뛰어내렸다.

“사이클롭스!”

에로스는 구름을 훅하고 불었다. 구름은 에로스가 바람을 불자 양옆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목소리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을 삼가라! 네놈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고 있느니라!”

에로스가 역정을 냈다. 사이클롭스는 하나 뿐인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사이클롭스는 양손을 교차시켜 머리위에 받치고 그 위에 올림푸스 신전 자체를 온 몸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제이가 새롭게 와서 인지 눈을 하늘로 향하며 정밀히 무게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었다. 에로스가 계속해서 소리를 치자, 사이클롭스는 눈을 감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무게는 계속해서 조정되는 모양이었다. 에로스는 사이클롭스의 속눈썹 크기보다도 작았다.

에로스는 사이클롭스가 좀 뉘우치는 듯 싶자, 다시 타일 위로 날아올랐다. 제이는 여전히 거대한 목소리에 겁을 먹어 웅크리고 있었다.

“일어서, 헤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에로스는 올림푸스 대문을 지나서며 재촉했다.

제이는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대문을 지나치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 문 위쪽 끝은 까마득히 높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제이는 바닥 재질이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바닥은 말끔한 상아색 석재타일에서 고운 모래로 변했다. 제이가 신고 있던 샌달에 고운 모래가 들어와 불편해졌다. 제이가 허리를 숙여 샌달을 벗으려고 하자, 에로스가 말렸다.

“그만둬. 헤라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제이는 머쓱해져서 샌들을 손으로 툭툭 털었다. 모래는 매우 고와서 털자마자 연기처럼 흩어졌다.

에로스는 대문에서 우측편 모퉁이로 돌아섰다. 모든 건물이 흰색과 상아색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눈이 아플정도 였다. 제이가 모퉁이를 두리번 거리며 돌아서자 에로스가 큼직한 돌판위에 올라서 있었다. 돌판은 지면에서 약간 솟아 올라와 있었으며, 제우스신의 문양이 회색돌판에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포탈이다. 헤라님이 계신 질투의 궁전으로 걸어가자면 한 달은 걸릴게다.”

“포탈이오?”

제이는 돌판위로 올라서며 물었다.

“제우스님의 힘을 빌린 물건이다. 번개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지. 자, 내 손을 잡으라구.”

제이가 에로스의 손을 잡자, 에로스가 눈을 감았다. 제이는 에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에로스 뒤의 풍경이 달라졌다. 돌판은 그대로 였지만, 주변의 광경이 전혀 달랐다. 돌판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돌판으로 제이와 에로스만이 움직인 듯 했다.

“이쪽이다.”

에로스가 다시 오른쪽 모퉁이로 돌아섰다. 질투의 궁전은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흰색과 상아색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기둥에 새겨진 조각은 온통 남성들뿐이었다. 문으로 향하는 계단 중앙에 드러누워 있는 사자도 갈퀴를 가진 숫사자였다.

“자크, 오랜만이구나.”

에로스는 계단을 휙 뛰어올라 사자의 갈퀴를 쓰다듬었다. 자크는 잠시 에로스를 바라보다 맹렬한 기세로 에로스에게 덤벼들었다. 에로스는 믿기힘든 속도로 오른손과 오른 다리로 각각 자크의 윗니와 아랫니를 멈추었다. 자크는 에로스를 물어 죽일 기세였지만 에로스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장난이 치고 싶은 모양이구나?”

에로스는 왼주먹으로 자크의 입천장을 올려쳤다. 자크는 계단 아래로 나뒹굴었다.

‘집채만한 사자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니……. 조그만 몸에서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걸까?’

제이는 자크를 멀찌감치 피해 계단을 올랐다. 계단위에는 건장한 남성이 조각인지 인간인지 모를정도로 미동도 없이 문 양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에로스가 문 앞으로 들어서자 두 남자는 절도있게 양 옆으로 물러섰다.

“이 사람들도 신인가요?”

“이들은 천사다. 그러나 영혼이 없어. 제우스님이 영혼을 주입하면 강력한 군대로 변신하지. 하지만 지금은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생각하라구.”

가만보니 천사들의 눈동자가 회색이었으며 초점이 없이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짓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지.”

에로스가 왼쪽에 있는 천사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강력한 킥을 맞은 천사는 건물 끝까지 처박혔지만 등에 있는 날개를 펄럭이며 제자리로 돌아와서는 다시 장면을 응시했다. 에로스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낄낄댔다.

“자, 시간이 없어. 얼른 들어가자구.”

제이와 에로스는 신전에 들어서 한쪽편에 있는 방문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옷을 갈아입고 반대편 문으로 나가면 헤라님을 만날 수 있다.”

“같이 안가십니까?”

에로스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길쭉한 의자에 드러누워서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헤라님이 원치 않으실거다.”

제이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 에로스가 걸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새하얀 의복이 크기별로 즐비했다. 제이는 흙묻은 티셔츠를 벗어서 한쪽으로 두었다. 제이의 넓은 등판이 드러났다.

“너, 몸 상태가 괜찮군.”

에로스가 한쪽눈을 뜨고 말했다. 제이는 조금은 당황해서 돌아보았다.

“어서 헤라님에게 가보아라.”

에로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제이는 옷장을 닫고 반대편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신전으로 향하는 가장 깊은 곳으로 통하는 복도가 보였다. 검은색 바닥타일에 중간중간에 푸르스름한 등이 있어서 간신히 앞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복도는 매우 좁았다. 제이는 헤라를 만나려면 모두가 탈의실이 있는 방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해 했다. 이윽고 복도의 끝에 문이 나타났다. 제이가 문을 열자, 천사 두 명이 그를 막아섰다.

“제이 알파벳입니다. 헤라님께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천사들은 제이가 하는 말을 아랑곳 하지 않고 제이의 온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정없는 말투로 한 천사가 말했다.

“청결상태 불량.”

제이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천사들은 제이의 양팔을 붙잡고 한쪽에 있는 방으로 움직였다. 방안에는 샤워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천사들은 제이의 의복을 벗겨 한족에 구겨지지 않게 개어놓고는 제이를 씻기기 시작했다. 제이는 당황해서 뿌리치려고 했으나 천사들의 무지막지한 힘에 짓눌려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샤워를 끝내자 천사들은 의복을 새로 입혔다. 의복은 하나의 흰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천 한쪽을 오른쪽 어깨로 둘러매고 가슴에 한 번, 허리춤에 한번 매듭을 짓고 허리에 있는 뱃지를 조이면 몸에 맞게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옷을 다 입어도 한쪽 가슴은 밖으로 드러나게 되고, 긴 치마처럼 펄럭여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느낌이었다.

제이는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복도를 지나왔던 문으로 돌아갔다. 천사들은 제이를 내려놓고는 다시 양쪽으로 흩어져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청결과 복장상태를 검사하는 임무만을 가지고 있는 천사들인 듯 했다.

제이는 약간 젖은 머리를 털고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홀은 넓었고 복도와는 다르게 태양이 비추는 거대한 창 때문에 매우 밝았다. 제이는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이윽고 홀 중앙에 섰다. 정면에는 붉은색 벨벳 시트로 이루어져 있는 큰 의자가 홀 바닥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의자 옆에는 헤라가 쓰는 듯한 지팡이 받침대도 보였다. 지팡이는 끝쪽에 붉은 빛과 보라 빛으로 되어 있는 둥근 보석이 반짝이고 받침대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러나 의자는 비어있었다.

“제이 알파벳이라고 했나?”

한 쪽에서 헤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라는 한쪽 어두운 구석에서 갑자기 나타나 제이의 곁으로 왔다. 제이는 이상하게도 헤라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가 없었다.

“예언의 아이치고는 건강해보이는 구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냉기가 가득했다. 헤라의 시선이 느껴지는 곳마다 신기하게도 소름이 돋았다. 헤라는 제이의 뒤편에 서서 말했다.

“문신을 보게 의복을 벗거라.”

제이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헤라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고 보랏빛 단발 곱슬 머리에 와인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의복도 제이의 것과 똑같아 한쪽 젖가슴이 드러나있었다. 제이는 황급히 다시 앞을 보았다.

“의복을 벗거라.”

헤라는 인내심이 없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제이는 그 싸늘한 말투에 겁을 먹고 허리의 뱃지를 움직였다. 제이의 큼직한 등과 함께 벌거벗은 전신이 드러났다.

“아직 덜 익었군.”

헤라는 제이를 지나쳐 성큼성큼 의자로 올라서서 앉았다.

“의복을 입고 무릎을 꿇거라.”

제이는 옷을 허둥지둥 걸쳤다. 의복은 탈착의가 매우 쉽고 빨랐다. 헤라는 무릎꿇은 제이를 바라보다가 근처를 두리번 거렸다.

“그년의 자식은 어디있지? 같이 오지 않았나?”

제이는 신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투가 익숙치 않아서 멍하니 있다가 헤라의 재촉하는 눈빛에 허둥지둥 입을 뗐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헤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애새끼 말이다. 꼴을 보니 또 탈의실에 처박혀 있나 보군. 건방지게…….”

제이는 헤라가 말하는 것이 에로스임을 깨달았다. 에로스가 탈의실에서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가도 알게 되었다.

“너는 오늘부터 악마들과 싸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앞으로 너의 인생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과 전혀 다르게 전개될 것이며, 또한 지금까지 쌓아온 속세와의 인연은 단절될 것이다. 지금 시간부터 너의 집은 올림푸스이며 고향또한 올림푸스다.”

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헤라의 젖가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헤라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에게는 고향이 있고, 가족과 친구가 있습니다. 루엔하임이 제 집이고 고향입니다. 저는 반드시 그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이의 말투는 바르고 곧았다.

“거절한다. 네놈의 선택권은 없다. 모든 것은 제우스신의 뜻과 계획에 의해 숨쉬고 움직인다.”

헤라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제이의 심지는 굳었다.

“도움을 드릴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 가족과 친구들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헤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악마들과 싸우는 일이 네놈의 가족과 친구들을 지키는 길이다.”

제이는 벌떡 일어났다. 헤라는 그 무례함에 적잖이 놀란듯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작별인사라도 하고 오겠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이렇게 생이별을 할 수는 없습니다.”

헤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순식간에 제이의 앞으로 날아와 검붉은 색으로 칠한 길게 기른 손톱을 제이의 눈을 겨누었다.

“아니면 네 새끼의 눈을 파내서 다시는 가족과 친구를 볼 수 없게 해주랴?”

제이는 몸을 벌벌 떨었으나 눈꺼풀은 깜박거리지 않고 정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설사 그렇게 될 지언정, 기어서라도 고향을 찾아가겠습니다.”

헤라는 잠시 제이를 노려보다가 손톱을 거두었다. 손톱은 제이에게서 멀어지자 다시 짧게 돌아왔다. 제이는 뒤를 돌아 나가는 길로 걸어나갔다. 헤라는 허리춤에 한 손을 올리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케이가 누구지?”

제이의 걸음이 멈추었다.

“반응을 보니 가족중에 한 놈인가 보군.”

제이가 돌아서서 물었다.

“케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천사 한 명이 다가와서 헤라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헤라는 건네받은 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전 이카루스에게 받은 보고에 의하면, 케이라는 놈은 악마쪽의 재규어와 미다스가 헬게이트로 끌고 갔다는군.”

“헬게이트요?”

“지옥말이다. 추정이지만, 루비콘강도 건넜다는 것 같군.”

제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너무 걱정마라, 죽었다는 뜻이니까. 니가 이카루스와 희희낙락하고 있을때.”

헤라는 종이를 뒤로 휙 집어던졌다. 천사는 종이를 주워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케이가 죽다니.”

제이는 온몸이 분노와 슬픔으로 떨렸다.

“이대로 놔두면 네 가족, 마을 유황불에 타서 사라질 거다.”

헤라가 가까이 다가와 제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여기서 수련하면 달라진다. 모두를 지킬 수 있다. 무슨말인지 알겠느냐?”

제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헤라는 눈짓으로 천사들을 불렀다.

“이 아이에게 거처와 음식을 준비해라.”

천사와 제이가 사라지자 헤라는 의자로 돌아가서 옆의 협탁위의 와인잔을 잡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천사가 다가와 포도주를 따랐다. 헤라는 와인잔을 둥글게 흔들며 향을 맡은 후 천사의 몸에 뿌렸다. 그리고는 천사의 몸에 흐르는 와인을 핥아 먹었다.

“잘 익었군.”

질투의 궁전의 문이 제이가 나서고 쿵 하고 닫혔다.

올림푸스의 중앙에 있는 번개의 궁전으로 이카루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홀 양옆으로 거대한 창이 나 있었고 홀 뒤쪽 벽에는 큰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그 앞으로 옅은 회색으로 정교한 무늬가 나있는 큰 의자가 있었고, 그 앞에 풍채가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카루스, 제우스님을 뵙습니다.”

이카루스가 홀 중앙에 꿇어 앉았다. 제우스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다. 제우스는 푸른색 깊은 눈동자와 어깨까지 오는 긴 짙은 갈색 곱슬머리에 긴 수염을 하고 있었다.

“본 보고에 앞서 중간계의 황폐화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야.”

제우스가 이카루스의 말을 끊었다. 이카루스는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말씀하십시오.”

“안들려, 가까이 와서 말해.”

이카루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허나 어찌 제가…….”

“지금 너랑 나밖에 없어. 이리로 와.”

이카루스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일어나서 다가갔다. 제우스는 여전히 삐딱하게 기댄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카루스는 제우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앉았다.

“중간계가 어쨌다고?”

“신전은 고사하고 교회조차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인간들도 더 이상 신에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건 인간계고, 드워프나 엘프쪽은 어떤데?”

이카루스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인간계가 많이 황폐화 되어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한심한 표정으로 이카루스를 바라보았다.

“성급하게 확대해석하지 마라 바보야. 알겠냐?”

이카루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또?”

“악마들의 술수로 날씨가 조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로 인해 신에 대한 의심을 조장하려고 한다?”

“그렇습니다.”

제우스는 몸을 천천히 앞으로 숙이고 손을 들어 이카루스의 머리를 때렸다. 이카루스의 고개가 바닥에 처박혔다.

“야, 수지타산이 안맞는다고 생각 안하냐? 날씨 조작할 수 있는 놈도 거기 몇 없어. 그놈들이 그 고생해가며 얻는 것이 고작 신에 대한 선동일 것 같냐?”

이카루스는 머리를 툭툭 털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보기엔 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제 본 보고해.”

“예, 예언의 아이는 찾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지금은 헤라님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제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찾았다고?”

이카루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대답했다.

“예.”

“그렇게 쉬울 리가? 루시퍼가 가만히 있디?”

“재규어와 미다스가 나타났었습니다만, 예언의 아이를 확보하는 것은 성공했습니다.”

“너랑 에로스랑 갔는데 미다스를 이겼다고? 어떻게?”

“그들은 엉뚱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엉뚱한 아이라니?”

“헤라님의 예언에 따라 등에 십자가 문신이 있는 아이를 찾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끌려간 아이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제우스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착각한건가? 이주알놈이 원래 허술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만, 뭔가 꺼림칙한데? 그래서 걘 지금 뭐하고 있는데?”

“예언의 아이 말씀이십니까? 헤라님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걜 왜 헤라한테 먼저 줘? 이리로 먼저 데려와야지.”

“예언의 아이가 맞는지 아는 사람은 헤라님 밖에 없어서 확인차 먼저 데려갔습니다.”

제우스는 잠시 생각하다 의자에 털썩 앉아 다시 삐딱하게 기댔다.

“그래, 뭐 욕봤다. 가서 쉬어.”

이카루스는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제우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제이는 거처에 들어섰다. 케이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제이는 몸에 힘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비켜서고 증오가 넘실거렸다. 주먹을 꽉쥐고 제이는 복수를 다짐하며 바닥을 마구 내리쳤다. 거처에 문이 살짝 열리고 에로스가 눈치를 보며 들어섰다.

“무슨일이야?”

제이는 에로스를 처다보았다.

“케이가 죽었답니다.”

제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라면, 그놈들에게 끌려간 다른 아이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죽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에로스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말했다. 제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물었다.

“헤라님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강을 건넜다면서…….”

“루비콘 강을 말하는 거로구나. 확실히 인간은 죽을때 그 강을 건너긴 하지. 하지만 그들은 케이를 예언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데려갔을 것이다. 죽이려고 데려가진 않았겠지.”

제이는 한가닥 희망을 발견했다.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공산이 크다는 말이지. 그러고보니 그 아이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있기는 한 데, 지금은 무리니까 일단은 좀 쉬라구. 내일부턴 혹독한 훈련이 있을거니까.”

“케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에로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생사만이라면 운명의 세 여신님께 확인할 수 있지. 따라와.”

둘은 거처에서 나와 올림푸스 한쪽에 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구석에는 포탈이 있었는데 인적이 없는지 돌판 사이사이에 잡초가 무성했다.

“이 포탈은 앞으로 다시는 이용하지 마라. 알겠지?”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로스는 눈을 감았다. 주변 풍경이 바뀌고 에로스는 눈을 떴다. 한쪽 구석에 돔형의 건물 한 채가 있고 나머지는 바로 하늘이었다. 오른편 먼 곳에 올림푸스가 보였다. 섬 같은 곳이었다.

“이리로.”

에로스의 행동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제이도 덩달아 조심스럽게 에로스를 따랐다. 에로스는 건물 앞으로 들어서서 문에 손을 대었다. 상아색 벽이 스르륵 움직였다. 에로스는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갔다.

건물안은 몹시 어두웠고 원형 건물 중앙에 서로의 등을 맡대고 앉아있는 세 명의 여자가 보였다. 한 명은 남색 머리, 한 명은 검은 머리, 한 명은 짧은 검은 머리였다. 세 여자의 눈에는 검은색 큼직한 기계가 끼워져 있었다.

“에로스, 제이 알파벳.”

셋 중에 누군가가 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세 여신님들 부탁이 있어서 여쭙고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갑자기 세 여신들이 분주해졌다. 서로 들리지 않게 속삭이다가 어느 순간 속삭임이 멈추었다.

“의결: 질문하라.”

또다시 누군가가 말했다. 에로스는 제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 녀석 풀네임이 뭐지?”

“케이 알파벳입니다.”

“케이 알파벳의 생사를 확인하여 주십시오.”

에로스가 묻자 다시 또 분주하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조용해졌다.

“의결: 사망했다.”

제이는 다리가 풀려 주저 앉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을 이었다.

“죽었으나, 완전한 사망이 아니고 제적을 당했을 뿐이라 영혼도 육체도 온전한 상태다. 단지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제이가 에로스를 처다보았다.

“되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됬지? 어서 나가자.”

제이는 아직까지 풀려 있는 다리를 질질 끌며 에로스와 건물 밖으로 향했다.

케이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은 분명히 케이 자신의 모습인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식, 꽤 무겁네. 역시 달 없는 밤은 힘들군.”

재규어가 중얼거렸다. 케이가 재규어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재규어는 쓰러져 있는 케이를 투덜거리며 지켜보다가 다가가는 케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케이는 흠칫 놀랐다.

“크하하, 놀랐지? 귀신이라도 된 줄 알았어?”

케이는 벙쪄서 말을 잇지 못했다.

“묻고 싶은게 많겠지만, 누군가가 널 애타게 기다리고 있거든? 어서 가자.”

재규어가 홀 한쪽으로 걸어갔다. 케이는 쓰러져 있는 자신을 계속해서 뒤돌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재규어가 홀 한쪽에 벽을 손으로 밀자, 짙은 회색 벽돌 하나가 스릉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벽 한쪽으로 밑으로 내려갈 수 있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재규어와 케이가 계단으로 들어서자 위쪽에 벽이 움직이며 닫혔다. 겨우 몇 걸음 뗐을 뿐인데 위쪽은 까마득히 보였다.

계단 중간 중간에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어서 계단 앞쪽이 은은하게 보였지만, 여전히 끝이 안보이는 계단이었다. 재규어는 남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유유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케이는 아주 어렵게 입을 떼었다.

“누가 기다리고 있죠?”

재규어는 걸음 속도를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이주알.”

재규어는 여전히 아무런 말 없이 계단을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케이는 그의 이름을 듣자, 약간의 의문이 생겼다.

“이주알이오? 이름이 천사같은데…….”

재규어는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 맞다. 그는 천사지. 아름다운 날개가 아주 일품이라고.”

“영문을 모르겠네요, 천사가 저를 보고 싶어하다니, 그것도 여기서.”

재규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서 케이는 하마터면 재규어의 몸에 부딪힐 뻔 했다.

“자세한 사항은 본인에게 물어보시길.”

재규어는 팔을 왼쪽으로 뻗어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허공을 붙잡고 돌렸다. 벌컥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열리고 또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규어는 계단 난간을 손으로 슥 밀었다. 난간은 살짝 열려 한쪽으로 접혀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변형되었다.

‘맨 밑이 아니란 말인가? 아래엔 아직도 한참인 것 같은데.’

케이는 속으로 생각하며 재규어를 따라 열린 허공으로 들어섰다. 허공안에는 의외로 다른곳에 비해 밝았다. 방 군데군데에 푸른 불꽃 램프가 있었고, 벽에도 푸른 횃불이 곳곳에 있었다. 방 정면으로 보이는 벽 한가운데 하데스의 홀에서 보았던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처다보는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이주알, 예언의 아이 배달왔다.”

재규어가 그 남자를 향해서 말했다. 남자는 칠흑같은 날개를 등에 달고 있었으나, 한 쪽 날개는 약간, 나머지 한 쪽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남자는 서서히 뒤를 돌았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머리에는 날개 모양의 투구를 쓰고 있었고 얼굴은 검은색 마네킹 같이 생겼다. 몸집은 재규어의 두 배 정도로 큼직했으며 은빛 갑옷을 끼고 있어 풍채가 더욱 커 보였다. 그러나 갑옷 허리쪽에 크게 파손 된 자국이 보였다.

“잘 왔다. 예언의 아이.”

케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경계를 조금 낮추었다.

“가까이 오라.”

재규어는 어느새 한쪽 벽에 다가가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케이는 조심히 이주알에게 다가갔다.

“내가 무서운가?”

이주알이 물었다.

“아니오.”

케이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있어요.”

케이는 이주알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이주알은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회색빛 의자에 걸터 앉았다.

“역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군. 좋다. 무엇이든 대답해주마.”

“여기가 어딘가요?”

케이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이곳은 지옥, 세상의 끝이다. 밑바닥이지.”

케이는 조금은 예상했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이곳에 오게된다. 생명을 지닌 상태에서는 그 무엇도 이 광경을 볼 수 없지.”

케이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오직, 너를 제외하곤 말이다.”

케이는 이주알을 올려보았다. 앉은 이주알이지만 케이보다 곱절은 높이 있었다.

“내가 허가를 내렸다. 때문에 너는 형체를 지니고 있는 상태로 이곳에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케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주위를 둘러보아라.”

케이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방이었다. 푸른 불빛의 양초들과 횃불, 십자가와 이주알의 의자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사실은 이 방, 그리고 네가 걸어내려온 계단, 제적을 당한 홀, 루비콘 강녘, 모든 지옥의 공간들은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

케이는 영문을 몰랐다.

“생명을 잃은 모든 것들은 이리로 와서 아무런 실체 없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서로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지. 그냥 아무것도 없이 흘러가고만 있을 뿐이다.”

이주알은 케이 바로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영겁의 시간을!”

이주알은 주먹으로 의자를 내리쳤다. 케이는 그 위압감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생명이 죽으면 생전에 저지른 잘잘못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간다고 들었나?”

케이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맞지만, 모든 생명은 죽으면 이리로 오게 되어있지. 천국은 올림푸스를 본 인간들이 상상해서 만든 그림일 뿐이다. 천국에 사는 것들은 올림푸스의 일부 신들일 뿐,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럼, 제가, 뭘, 해드리면 되나요?”

케이가 더듬거렸다.

“우리는 계획을 하나 세우고 있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

이주알은 숙였던 허리를 다시금 곧추 세웠다.

“세상 모든 것을 지옥으로 만들겠다. 여기서 떠도는 영혼이 생명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불평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싸그리 불태우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케이는 어떻게 반응을 할 줄을 몰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이주알이 큼직한 손을 들어 케이의 작은 팔을 붙들었다.

“네가 그 초석이 되는 거다.”

케이는 차가운 철의 느낌이 팔로 전해져 왔다. 묵직한 힘이었지만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

“너는 예언의 아이다. 들어본 적 있나?”

케이는 기억을 뒤졌다. 재규어가 예언의 인간이니 하는 소릴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인간 시간으로 일천년도 전에 신이 예언을 하나 했다. ‘예언의 인간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라는 예언이고, 이 것은 진리다. 그리고 그 예언의 아이가 바로 케이 너다.”

이주알을 말을 이었다.

“‘세상을 구한다.’ 라는 문구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예언의 주체는 예언의 인간 자신이다. 세상을 구하는 방식도 그 아이에 결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 다는 뜻이지. 네가 올림푸스 신들을 도와 지옥을 파괴시키는 것을 세상을 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네가 우리를 도와 모든 생명을 부수고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주알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지어다.”

이주알은 벽에 붙은 십자가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초석이 아니라 계획의 전부인것 같은데요?”

케이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이주알은 휙 돌아보았다.

“너를 차지했다고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은 최후의 최후. 그동안 우리가 했던 모든 노력을 보상받는 시간일 뿐이다. 너는 계획의 청사진일 뿐이다.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을 놓았다가는 너를 놓치고 잃게 될 지도 모르지.”

“그럼 저는 그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나요?”

“그냥 기다리면 지루하지. 허무를 즐기라. 널 위한 축제가 마련되어 있다.”

재규어가 슥 하고 일어섰다.

“이제야 끝냈나, 지루해 죽는 줄 알았군.”

이주알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큰 칼을 꺼냈다.

“시간이 무르익었다. 형제들아. 예언의 아이에게 우리의 축제를 선물하라.”

이주알은 말을 마치고 칼을 바닥에 꽂았다. 칼 주위로 땅이 푸른 빛을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케이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재규어가 케이 옆으로 다가왔다.

“걱정하지마라, 형제야. 이제 너를 겁먹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케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아래로 한 없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으나, 이내 그런 기분은 사라졌다.

“눈을 떠라 형제여.”

이주알의 목소리에 케이는 눈을 떴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케이 주변을 바쁘게 움직였고, 음식 냄새, 술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왔다.

“이 친구 잔 비었다. 이리로!”

누군가가 케이에게 술잔을 쥐어주었다. 케이는 어쩔줄을 몰라했다. 모두들 케이에게 술을 권했고 케이는 얼떨결에 한 잔을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놀랄만큼 멋진 술이었다. 케이는 금방 다시 찬 술잔을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모두들 그런 케이를 보며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케이는 금방 분위기에 휩쓸려 환한 웃음을 지었다.

제이는 이튿날이 되어 제우스의 궁전에 초대되었다. 궁전은 그 어떤 궁전보다 넓고 컸으며, 벽과 천장에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고, 창문마다 제우스가 세운 공적들이 멋진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여성 천사들이 기둥마다 앉아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으며, 어디선가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제이는 전날 밤 에로스가 한 당부를 떠올렸다.

‘운명의 세 여신에 대한 이야기는 입도 뻥긋하지마라. 넌 계속해서 케이에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 척 해야해. 알겠지?’

거대한 홀에 제이와 천사들만이 있었다.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어디선가 하프소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기타소리가 났다. 아름다운 화음이 홀 전체를 휘감았다. 긴장했던 제이마저도 미소를 짓게 하는 음악이었다. 제이의 뒤쪽에서 큼직한 문이 열리고 금발의 멋지게 생긴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들어섰다. 발걸음이 몹시 가벼워 보였고, 얼굴은 싱그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뭘 그리 멀뚱히 서 있어? 먼저 왔으면 자리에 앉아 있어.”

금발 남자는 기타 연주를 멋지게 마무리 짓고 제이를 지나치며 말했다. 남자가 지나갈 때 희미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내 이름은 아폴로다. 넌 제이지? 잘 부탁한다.”

아폴로는 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

“신궁 아폴로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이는 살며시 아폴로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마음이 전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나야말로. 난 자리에 가서 앉을게.”

아폴로는 많은 의자중에 왼쪽에서 가장 깊은쪽 의자에 앉았다. 제우스가 앉을 것 같은 큼직한 의자에서 가장 가까운 의자였다. 의자에 앉자 마자 기타는 내려놓고 품에서 작은 하프를 꺼내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작은 하프는 여성 천사들이 연주하는 것 보다 높은 소리를 내서 절묘한 화음이 울려퍼졌다.

제이가 음악에 빠져 황홀해 하고 있을 때쯤 뒤쪽 문이 또다시 열렸다. 한 여성이 천사들에 제지를 받고 있었다.

“아테나님, 본 궁전에는 어떠한 무기도 착용이 금지됩니다.”

아테나는 조금 신경질 적으로 몸에 걸친 무기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수도 없는 무기들이 홀 한쪽에 쌓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보다 작은 암수부터 큼직한 대포까지, 작은 여성의 몸으로 어떻게 모두를 짊어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무기들이었다. 한참동안 시간이 흘러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아테나는 약간 구릿빛 피부에 짙은 남색 머리를 올려 묶은 개구쟁이 소녀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표정은 아주 굳어있었다. 천사가 길을 터주자 아테나는 성큼성큼 걸어와 제이의 바로 왼쪽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테나와 아폴로 사이에는 세 개의 빈자리가 있었다.

“여, 동생, 좋아보이는군.”

아폴로가 아테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쌀쌀맞군 그래.”

아폴로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다시 의연히 하프를 연주했다. 아테나는 멍하니 약간은 화가 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쪽 문이 또 열렸다. 뒤쪽이 소란스러웠다.

“이카루스님, 이제 그만하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금지된 포탈을 건드리다니? 어딜 다녀온거냐?”

“이카루스님, 이제 홀입니다. 벌써 여러분들이 와 계세요.”

“너 이따가 나랑 얘기좀 하자.”

잿빛 머리의 이카루스가 역정을 내며 들어왔다. 다른 신들은 그 소동에 아무 신경도 안쓰는 느낌이었다.

“자리로 가서 앉아라.”

이카루스가 왼쪽 끄트머리 자리에 가서 앉았다. 에로스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제이는 에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에로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들!”

지켜보던 아폴로가 이카루스에게 소리쳤다. 이카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목례를 했다.

“반갑다! 잘 지내니?”

이카루스는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아폴로는 싱긋 웃으면서 의자 등 받이에 걸터 앉아 연주를 이어갔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이 쓰레기들 좀 치워라.”

헤라는 아테나의 무기들을 가르키며 말했다. 천사들은 일사분란하게 무기들을 한 쪽으로 옮기기 바빴다. 헤라는 제이를 지나쳐 갔다. 짙은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제이는 이상하게도 헤라를 똑바로 처다 보지 못했다.

“어머니, 잘 지내셨나요?”

“오냐.”

아폴로가 헤라를 보며 말했다. 헤라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의복을 한 번 펄럭이곤 아폴로의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아폴로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는 정말 오랜만에 뵙는 군요. 모습이 정말 좋아보이네요. 소녀같습니다.”

“육체 나이는 열 다섯도 안되느니라.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 곤란하지.”

헤라는 정말 아이같은 모습이었다. 제이는 전날 본 것 보다 더 작아 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뒷문이 다시 열리고 상처 투성이의 남자가 들어왔다. 상체 의복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하의도 거의 누더기였다. 근육질의 상체에는 방금 입은 상처도 있는 듯 피가 흐르고 있었다.

“헤라클레스, 신들을 뵙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어쩌다가 제이는 그 인사를 받는 곳에 멀뚱히 서 있다가 급히 한 쪽으로 비켜섰다. 헤라클레스는 그런 제이를 힐끔 보고는 지나쳐서 자리로 향했다.

“아들, 이리 오너라.”

헤라클레스는 에로스 옆에 앉으려다가 헤라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허나, 어머니, 자리는…….”

에로스가 말 없이 헤라클레스를 떠밀었다. 헤라클레스는 어정쩡하게 헤라 옆으로 가서 앉았다.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네 까짓게 그 자리에 앉아도 된다고 생각해?”

문쪽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렸다. 제이가 뒤를 돌아보곤 황급히 앞을 바라보았다. 금발의 굵고 긴 곱슬 머리를 한 반 나체의 여성이 뒤에 서 있었다. 머리에는 월계수잎으로 만든 관을 썼으며 피부는 백옥보다도 빛났다. 상의를 벗어 밑으로 묶어서 희고 아름다운 젖가슴이 창가를 통해 비치는 햇볓으로 반짝거렸다. 문자 그대로 눈이 멀 정도의 빛나는 자태였다.

“너 이 썅년이 내 아들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어머, 만물의 어머니께서 말씀이 거치시군요.”

“난 니들의 어머니일 뿐이지. 만물의 어머니는 데메테르다.”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여자 이름따윈 꺼내지도 마세요.”

여신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다가 제이를 목격했다.

“이 천한 것은 누구죠?”

제이는 차마 그녀를 처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예언의 아이다. 넌 오늘 여기 왜 불려왔는지도 모르고 왔느냐?”

헤라가 비웃으며 말했다. 여신은 헤라를 약간 흘기고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제이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아프로디테에요.”

제이는 그 아름다운 이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이, 제이 알파벳입니다.”

아프로디테는 눈웃음을 한 번 치고는 다시 표정을 구기고 헤라 옆으로 다가갔다.

“좋은말로 할 때 자리에서 꺼지거라.”

헤라클레스는 벌떡 일어나 에로스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아프로디테는 헤라의 옆자리를 비워두고 그 옆자리로 앉았다.

“니 자리는 내 옆이 아니었나?”

헤라가 무서운 독기를 품고 물었다.

“그깟 불꽃에 쩔쩔매는 천한 것이 앉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죠.”

헤라가 손톱을 세웠다.

“아가리 다물어라. 핏빛 옷을 입고 집에 가고 싶으냐?”

“내 옷장에 수도 없이 많은 옷이 있다는 걸 잊으셨나요?”

“살기를 거두세요.”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쪽에서 걸어오는 여성은 아프로디테 보다 옅은 금발에 땋은 머리를 한 여성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녀서 아프로디테보다는 덜 하지만 몹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는 방금 아프로디테와 마주친 터라 그녀가 추녀에 가깝게 느껴졌다.

“제우스님이 곧 오실겁니다. 한 줌 살기도 남겨선 아니됩니다.”

그녀는 아프로디테와는 대조적으로 목과 손 발을 제외하고는 희고 노란 의복으로 칭칭감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지저분하지는 않고 단정하면서도 단아했다.

“이야, 누이. 이건 정말 오랜만인걸?”

아폴로는 신이나서 말을 건넸다.

“오라버니는 여전하시네요.”

그녀는 멀뚱히 서 있는 제이를 발견하곤 말을 건넸다.

“당신은 분명 예언의 아이겠군요. 아르테미스라고 합니다.”

아르테미스는 어느새 흰 장갑을 끼고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살며시 악수를 했다. 기품이 느껴졌다. 아르테미스는 헤라와 아프로디테 중간에 앉아서 서로를 달랬다.

“이러지들 마세요. 인간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으신가요?”

“나한테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은혜도 모르는 년아.”

헤라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말을 뱉었다.

“어머니,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아프로디테도 그 검을 내려놓으세요.”

아프로디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쥐고 있던 칼을 앞으로 집어던지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칼은 아주 날카로워 보였다.

“그래, 그러고보니 영감이 안보이는구나. 벌써 헬 게이트로 가셨나?”

헤라가 검을 보더니 이죽거렸다. 이윽고 문이 살며시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들어온 것은 여든이 훌쩍 넘어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바퀴의자에 앉아서 미끄러지듯이 홀로 들어왔다. 뒤에서 미는 이도 없는데 바퀴의자는 혼자서 잘도 움직였다.

“이봐, 여기 의자 좀 치워줘.”

아폴로가 손짓하자, 천사 둘이 와서 아폴로 옆에 있던 의자를 치웠다. 노인은 아폴로 옆으로 바퀴의자를 몰고는 멈추었다. 홀안의 의자는 거의 모두 주인을 찾아 갔다. 비어있는 것은 노인과 아테나 사이의 두 개의 의자와 제우스가 앉을 정면의 큰 의자 뿐이었다.

“거의다 온 건가? 헤르메스가 안보이는군.”

“그 쥐새끼는 어차피 아버지와 같이 올거야.”

아프로디테가 두리번 거리는 아폴로에게 말했다.

“그럼 남은 건 하나 뿐이군.”

아폴로가 웃으며 하프를 튕겼다.

‘절그럭, 절그럭.’

헤라가 한쪽 입고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납시셨군.”

홀안으로 쇠사슬 끄는 소리가 진동했다. 향긋한 음식과 과일 냄새도 순식간에 쇠냄새로 뒤덮혔다. 음악도 더는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아폴로는 연주를 중단했다. 문이 열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회색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가 들어섰다. 멋진 장식은 없지만 기능성이 탁월할 것 같이 생긴 갑옷 안쪽으로 남색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걸을때 마다 속에 입은 쇠사슬 갑옷이 비벼져 절그럭 소리를 냈다. 남자가 문을 열자 천사들이 그를 제지했다. 그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키만한 검을 옆으로 내려놓고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갔다. 쉴새 없이 떠들며 다투던 신들도 잠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테나의 옆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앉고서도 투구를 벗는일은 없었다. 아테나는 누가 나타나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다 모였느냐?”

모두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갑옷 남자가 앉자마자, 창공에서 소리가 났다.

“헤르메스가 없습니다. 아버지.”

아폴로가 하늘을 향해 말했다.

“나와 같이 있느니라.”

아프로디테가 그것보라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바깥에 햇빛이 사그러들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번쩍하는 섬광과 동시에 제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우스는 한쪽 팔을 턱에 괴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오래전부터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 처럼 눈깜짝할 새였다. 그 옆에 키가 작은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후다닥 뛰어와 갑옷 남자와 노인 옆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열 두명을 모아놓으니 참 장관이구나.”

제우스가 말하고서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시종일관 삐딱하게 앉아 있던 헤라도 자세를 고쳐 앉았고, 싱글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앉아있던 아폴로도 내려와서 바르게 앉았다. 아프로디테도 의복을 고쳐 입었다. 그 웅장함에 제이는 저절로 무릎이 풀려 꿇어 앉았다.

“이렇게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부름에 잘 답해주었다. 거동이 불편한 헤파이스토스와 두문불출하는 아르키메데스까지 한 자리에 모이다니, 참 기쁘구나.”

헤파이스토스와 아르키메데스가 고개를 숙여 칭찬에 답했다.

“자, 이렇게 다들 바쁜데 모이라고 한 것은 다들 보고를 받았겠지만 이카루스와 에로스가 예언의 아이를 찾아가지고 왔다. 앞으로 나오라.”

제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걸어서 홀 중앙에 섰다. 모든 신들이 제이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어냐.”

“제이 알파벳입니다.”

“제이는 이 회의가 끝나면 대(待)악마 전사로써 훈련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 신을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과목마다 전담 스승을 붙이기 위함이니라.”

신들은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놀라고 불만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귀찮은 것은 알겠지만, 미래에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줘야 하는 일이다.”

제우스는 약간은 심기가 불편해 진 느낌이었지만 잘 참고 말을 이어갔다.

“먼저, 아폴로는 마법을 가르치거라.”

아폴로는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파이스토스는 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주어라.”

헤파이스토스는 가까스로 입을 떼었다.

“말씀드리기 황공합니다만, 저는 능력이 쇠하여 새로운 무기를 만들 수는 없사옵니다.”

제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을 더 강력하게 만들도록 하라.”

헤파이스토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레스는 검술을 가르치거라.”

갑옷 인간은 고개를 숙였다.

“아테나는 전술과 무기 사용법을 가르치거라.”

아테나는 고개를 숙였다.

“헤르메스는 역사를 가르치거라.”

헤르메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헤라클레스는 무술을 가르치거라.”

헤라클레스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마법수업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차례로 시행하라. 이후의 일정은 헤르메스가 담당할 것이다.”

제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 것이 있거나 불만이 있다면 지금 떠들거나 영원히 입을 다물어라.”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제이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신들은 일제히 제이를 노려보았다.

“뭐지? 예언의 인간.”

제우스는 걸어가려다 말고 멈추었다.

“악마들이 데려간 제 동생, 케이의 안위가 걱정됩니다.”

에로스의 표정이 심각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제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헬게이트를 열어 지옥으로 떨어졌다. 루비콘 강을 건너 생명을 잃었으며,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홀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또한 보고에 의하면, 홀 오브 헬의 문을 제 손으로 직접 열었다고 한다. 이는 강요에 의한 투항이 아님을 입증하는 바이며,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그가 눈 앞에 나타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제우스는 또 다시 섬광에 휩싸였다. 빠지직 하는 스파크 소리가 제우스의 근처에서 들렸다.

“적이다.”

강렬한 섬광과 함께 제우스는 홀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제이는 에로스를 처다보았다. 에로스는 이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제이는 아폴로와 헤르메스와 함께 궁전 앞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은 넓고 푸르렀으며, 온갖 동물들이 뛰어놀았다. 토끼, 사슴등 초식 동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내가 첫 스승이라고 하니 영광이네, 잘 부탁해.”

“아닙니다. 신궁 아폴로님을 뵙게 되는 것이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아폴로는 손사레 쳤다.

“신궁 소리 그만두지 않을래? 신이 활을 쏘니 신궁이란 호칭은 당연한거야, 앞으론 아폴론이라고 불러.”

제이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가르칠 것은 마법이야. 아버지의 뜻을 알겠어. 어째서 나를 맨 첫 번째로 정하셨는지 말야.”

아폴로는 제이의 등 뒤로 돌아갔다. 제이는 뭘 하는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 보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위치가 틀리면 곤란하니까.”

제이는 아폴로의 말에 다시 정면을 보았다. 아폴로는 손가락으로 제이의 등을 훑다가 한 곳에서 멈추고는 손바닥을 펼쳐 등에 댔다. 제이는 아폴로의 온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긴장해.”

제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폴로의 손바닥에서 터무니 없는 온도를 느꼈다.

“얍!”

아폴로가 외마디 기합을 외쳤다. 제이는 순식간에 온 몸이 타는 느낌을 받았다. 혈관 하나하나가 가공할 온도에 끓어 없어지고 수증기로 변해 귀와 코로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순간이었고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다. 아폴로는 제이의 눈 앞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조심해. 힘조절을 해야 해.”

제이는 아폴로가 뭐라고 떠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감각이 곤두서고 온 세상이 느려보였다. 새가 날아가는 것, 토끼가 뛰어가는 것, 아폴로의 말소리 조차 너무도 느려서 한 손에 잡아 으스러 뜨릴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었다.

“너는 이미 중간계에서는 가장 강한 존재가 되었다. 반신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너의 혈관에 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제이는 서서히 아폴로가 하는 말을 알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잔뜩 긴장되어 있는 감각은 여전했다.

“움직임을 주의해라. 조심히 한 발자국 걸어봐.”

제이는 앞으로 한 발짝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총알 같이 정면으로 뛰쳐나갔다. 지나가는 풍경들이 잠깐 멈추었다가 뒤로 뒤늦게 휙휙 넘어갔다. 떨어지는 나뭇잎에 얼굴이 마구 베였다. 그러나 상처들도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올림푸스를 벗어나 구름 위로 떠 있었다. 제이는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밑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헤르메스가 나타나서 뒷덜미를 잡고 끌고 날아갔다. 작은 몸집에 잡혀 날아가는 것이 올림푸스에 처음 왔을 때 에로스에게 당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주의하라니까.”

아폴로가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의 감각은 신의 필적할 정도지만, 육체는 적응이 안되어있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는 움직일 수도 없을 거다.”

제이는 아폴로의 말을 너무도 실감했다. 헤르메스에게 내려지고, 대자로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폴론님……. 몸이 안 움직입니다.”

“넌 방금 초음속으로 움직였다. 인간의 육체가 견디는 것이 이상한 거야. 그나마 혈관을 도는 피가 형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거다. 관절과 근육은 아작이 났을거야. 뭐 반나절이면 말짱해지겠지만.”

제이는 몸안에서 부글부글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제이의 몸 안에서는 미친듯이 세포들이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감각에 맞춰서 진화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며칠이면 적응할 수 있을 거다. 적시적소에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될거야. 그건 배우는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할 수 있게 되는거야.”

아폴로는 헤르메스를 시켜 무엇인가를 가져오게 했다. 이윽고 헤르메스는 칠판 하나를 들고 왔다.

“시간이 아까우니까 누운체로 설명을 들어라. 실습은 내일부터다.”

제이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칠판을 바라 보았다. 아폴로는 부들부들 거리는 꼴이 보기 싫었는지 칠판을 비스듬히 눕혀서 제이가 누워서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법이란 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성(聖)마법, 신마법, 흑마법이 있지. 성마법은 신의 이름을 빌려서 쓰는 마법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도 신앙심만 깊다면 누구든지 쓸 수 있다. 네가 지금까지 살면서 본 마법은 전부 성마법이라고 생각하면 돼.”

제이는 이카루스가 루엔하임에서 교회당 터에서 시전했던 마법을 떠올렸다.

“신앙심 깊은 인간이 성마법을 시전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미미하다. 기껏해야 어두운 동굴에서 빛을 일으키거나, 하급악마의 퇴마, 경미한 상처 치료 정도다. 마법이 깃든 도구나, 많은 시간을 들인 노력정도로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아폴로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성마법을 시전하면 그 파괴력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거기다 신은 언령도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다.”

아폴로는 헤르메스가 가져온 두꺼운 책을 건네받고 제이의 옆에 놔두었다.

“이걸 앞으로 달달 외우도록 해라. 모든 성마법의 언령과 기도문이 써있는 책이다. 육체와 감각 뿐만 아니라, 두뇌도 수준급으로 발달되었을 테니, 반나절이면 얼추 파악이 될 거다.”

아폴로는 칠판에 써논 신마법을 손으로 탁 하고 쳤다.

“그러나 그 성마법의 파괴력이라는 것도 중간계에서나 강력한 것이지, 이름있는 악마들을 상대하려면 턱없이 모자라다. 그래서 네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신마법이다.”

아폴로는 설명을 멈추고 제이에게 다가왔다. 아폴로는 제우스가 명령한 일을 수행할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장난기는 온데간데 없고 시종일관 진지하고 또 곧았다.

“손을 들어 나를 만져라.”

제이는 가까스로 팔을 들어 고개를 숙인 아폴로의 어깨를 만졌다. 만지는 동시에 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분이 어때?”

아폴로가 물었다.

“온 몸에 힘이 솟구칩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네 몸에 나의 마나가 가득찼기 때문이다. 이로써 너는 태양의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헤르메스는 또 다른 두꺼운 책을 가지고 왔다. 아폴로는 책을 건네 받고 성마법이 적혀 있던 책 위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모든 신마법의 언령을 적어 놓은 책이다. 마법을 쓸 때는 그 신의 마나와 함께 언령을 뱉으면 시전된다.”

아폴로는 내려놓았던 책을 집어서 펼쳤다.

“나를 계속 잡고 있어. 어디보자, 언령은 나도 쓴 지가 오래되서 가물가물 하군. 간단한 것부터 해보자. 나를 따라해라.”

아폴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태양의 신, 제우스의 아들, 신궁 아폴로님의 화살은 어둠을 거두고, 악함을 부수고, 저열함을 태우느니라. 꿰뚫기에는 창보다는 나은 것이 없고, 불사르기에는 태양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불꽃의 창이여 고개를 들라. 솔라 스피어!”

“태양의 신, 제우스의 아들, 신궁 아폴로님의 화살은 어둠을 거두고, 악함을 부수고, 저열함을 태우느니라. 꿰뚫기에는 창보다는 나은 것이 없고, 불사르기에는 태양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불꽃의 창이여 고개를 들라. 솔라 스피어!”

제이는 아폴로의 어깨에서부터 뜨겁게 끓어 오르는 기운이 자신의 몸을 거쳐 한 곳으로 모이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용암이 넘쳐서 어디로 갈 지 몰라 헤메이다가 작은 구멍을 발견 한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마나가 모였으면 쏘아 올려라.”

제이는 강렬하고 뜨거운 느낌에 아폴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쏘지 않으면 네 안에서 폭발한다. 손으로 갈겨!”

아폴로는 급히 소리쳤다. 제이는 반사적으로 손을 앞으로 향했다.

“윽!”

아폴로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제이의 손 끝에서 엄청난 길이의 불꽃창이 나타났다. 불꽃창은 맹렬한 기세로 제우스의 궁전으로 날아갔다. 궁전에 닿기 직전에 헤르메스가 번개같이 나타나서 발로 걷어차 하늘로 날려버렸다. 한참을 날아간 불꽃창은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늘을 향해 쏴야지, 궁전이 박살날 뻔 했구나.”

아폴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훌륭하구나, 두뇌도, 마나의 적응력도 빠르다. 본 적도 없는 솔라스피어를 단 번에 쏘아내다니…….’

“윽.”

제이가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다.

“참, 나를 놓아야지. 너무 많은 마나가 몸에 흘러갔구나.”

아폴로는 제이를 다시 바닥에 눕혔다. 고통은 더 심해졌으나 회복은 더 빨라졌다.

“어쨋든, 이것이 신마법이다. 이제는 태양의 마법을 쓸때마다 일일이 나를 붙잡을 필요는 없다. 나를 잡아서 내 마나를 받아들였던 느낌을 기억해내기만 하면, 네 고유의 마나가 내 마나로 변형되어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 물론, 잡고 있을때의 위력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하지만, 네가 싸울때마다 모든 신을 대동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일일이 모든 신을 찾아다니면서 마나를 흡수할 필요도 없다. 신들의 생김새만 기억한다면 마나를 가져다 쓸 수 있다. 하지만, 쓸 때 마다 힘의 주인인 신들에게 마법을 쓴다는 사실이 전해지니까 남용하면 막으러 갈꺼다.”

아폴로는 말을 마치고는 칠판에 써놓은 마지막 글자, 흑마법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남은 하나는 흑마법인데, 이것은 알려주기는 하겠지만, 네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헤르메스가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아폴로의 근처로 돌아왔다. 발등에 약간의 그을음이 생겼다.

“악마에게 대항하는 데에는 성마법, 신마법 두가지가 있지만 악마들이 신에게 대항할때는 흑마법 한 가지 밖에 없다. 악마들의 수장인 루시퍼의 힘을 빌려쓰는 것이고, 아주 강력한 어둠의 힘을 담고 있다. 중간계에서도 간혹 가다가 흑마법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기껏해야 죽은 자를 일으켜서 싸우게 한다던지, 약한 최면을 거는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악마들이 쓰는 경우에는 대단히 위험하다.”

제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악마가 쓰는 흑마법에 공격당하면, 신체가 파괴됨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강력한 세뇌공격을 당한다. 다시 말해, 전투불능 뿐만 아니라 단숨에 아군이 적군으로 돌아선다는 말이지.”

아폴로는 말을 이어갔다.

“결론은 마법과 육체를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인한 정신력. 악에 맞서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거다.”

제이는 누운체로 아폴로를 바라보았다. 아폴로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윽고 홀에서 봤던 천진난만한 청년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네 몸이 회복되고나면 본격적으로 마법을 공부해보자.”

아폴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이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케이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기분만 한 없이 좋아질 뿐, 정신은 오히려 조금씩 또렷해졌다. 주위에서 웃고 떠들던 소리도 조금씩 멀게 들렸다. 케이는 비스듬히 누워 있던 푹식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 풍경들도 약간씩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술잔도 느낌이 흐릿했다. 술잔을 쥐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순간,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더니 술잔이 사라졌다. 주위에도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다시 이주알과 마주 앉았다. 주변은 이주알의 방으로 돌아왔다. 고요함만이 남아있었다.

“기분이 어떤가?”

이주알은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조금 멍해서…….”

“너는 지금까지 인큐버스 안에 있었다. 너의 꿈속으로 들어가서 인큐버스가 원하는 그림을 삽입한 것이다.”

방 한쪽에서 희고 긴 머리카락의 키 큰 남자가 나타났다.

“내가 인큐버스다. 잘 부탁해.”

케이는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인큐버스가 보여준 화면은 우리가 세계를 공평하게 만들면 탄생하는 세상이다. 네가 이해하기 쉽게 조금 변형했지만, 원리는 같다.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누군지 모르는 세상이다. 모든 영혼이 하나로 융합되어, 평등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기분이었어요.”

인큐버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마신 술은 타인의 영혼이다. 맛이 어떻디?”

케이는 술의 맛을 떠올렸다. 아직도 입안에 향이 남아 있을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은은한 맛이었다.

“너무 황홀한 맛이었어요. 굳이 다시 마시지 않더라도 내 머릿속에서 맛과 향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이주알의 검은 얼굴이 번쩍였다.

“그것이 융합이다. 타인과 소통, 대화, 이해 따위들과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이지.”

케이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타인과 아무리 대화하고 소통하고 이해시키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쉽게 말해 결국은 단일체들 사이에서는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 묻지, 아무리 잘 맞는 사람이고 친한 상대와 이야기해도 상대방이 너의 말에 얼마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하나?”

케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거의 이해하지 않았을까요?”

“아니, 이십프로 이하다.”

이주알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도 상대방도 이해하고, 또 이해시켰다고 멋대로 믿고 있을 뿐, 실상은 전혀 다르다. 상대방을 오롯이 이해하려면 대화같은 저급한 수단으론 불가능 하다.”

“융합……. 이군요.”

“바로 맞았다. 네가 맛보았던 그 술의 맛, 상대방을 하나하나 모두 이해한다는 것의 달콤함. 그것을 모두에게 느끼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하나뿐인 우리의 목표다.”

케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큐버스, 이제 케이를 데려가라.”

인큐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큐버스가 케이곁으로 오자, 그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매끈한 턱선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앞 머리는 짧았지만,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긴 머리를 했다. 전체적으로 새하얀 색깔의 머리카락이었지만, 양쪽 귀 위쪽으로 새빨간색의 머릿칼이 있었다.

“가자.”

케이는 벌떡 일어나서 인큐버스를 따라 걷다가 화들짝 놀랐다.

“왜 그래?”

케이는 멈춰서서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걷고 있네요?”

인큐버스는 이주알을 바라보면서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걷는게 어때서?”

“난 태어나서 걸어본 적이 없어요. 허리 밑으로 움직여 본 적이 없는데요?”

케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럼 넌 어떻게 재규어를 따라 그 긴 계단을 내려왔지?”

케이는 멍해졌다.

“걱정마라, 영혼과 육체가 나뉘어지고, 영혼이 다시 육체로 재구성 된 것 뿐이다.”

이주알이 말했다.

“지금은 반 영혼인 상태고, 곧 있으면 새로운 육체가 날아 붙을 것이다.”

이주알이 말을 마치자 마자 케이의 오른손이 묵직해졌다. 케이는 반사적으로 몸이 한 쪽으로 기울었다.

“육체라는 것이 원래는 그토록 무거운 것이다. 생전에 있었던 노폐물과 작은 병들조차 사라진 태아 같은 육체이므로 이번에는 소중히 다루도록 해라.”

이주알의 말이 끝나자 케이의 몸에 또다른 변화가 생겼다. 이번에는 왼쪽이 묵직해져서 오히려 균형을 맞추기가 쉬웠다. 그러나 머리와 몸통이 연이어 날아 붙어, 그 반동으로 케이는 뒤로 풀썩 쓰러졌다. 이윽고 두 다리도 날아와 붙었다. 케이의 몸 전체가 이전보다 약간은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케이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서. 할 일이 태산이다.”

인큐버스가 재촉했다. 케이는 인큐버스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다시……. 안 움직이는데요?”

케이는 다리를 가리켰다. 인큐버스는 놀라서 이주알을 처다보았다.

“이주알, 이건……!”

이주알은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케이에게 다가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전에 잘려나갔다고 해도 새로이 붙은 육체는 온전할 터…….”

이주알은 케이의 다리에 손을 데었다가 황급히 떼었다.

“뭐야?”

인큐버스가 물었다. 이주알은 긴 침묵후 대답했다.

“저주다. 그것도 아주 고등저주. 이 상태로는 저주의 실체조차 파악할 수 없다.”

이주알은 슬그머니 일어서서 허리춤에 찬 긴 칼을 뽑았다. 칼의 자루에는 부서지고 마모되었지만 날개를 단 천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주알이 크게 호흡하고 집중하자, 칼자루의 새겨진 천사의 눈과 이주알의 검은 얼굴에서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 개의 빛이 반짝였다. 푸른 촛불 말고는 빛이 없던 방안에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젠장, 갑자기 하면 어떻게 해?”

인큐버스가 팔로 눈을 가리며 물러섰다. 인큐버스의 양 팔에는 박쥐의 날개처럼 검은 날개가 매달려 있었다.

이주알은 검으로 케이의 다리를 겨누었다. 이주알의 눈과 검자루의 천사의 눈의 빛이 사그라 들면서 검 끝에서 아주 밝은 빛이 생겼다. 빛은 검에서 떠나와 케이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다리에 머물렀다. 다시 한 번 찌를듯한 섬광이 방을 메웠고, 순간이 지나자 빛은 사라졌다. 케이의 다리에는 보랏빛 기분나쁜 형상이 안개처럼 뿌옇게 맴돌고 있었다.

인큐버스는 케이쪽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이것이 저주의 실체인가? 이렇게 또렷한 것은 처음보는군.”

이주알은 검을 땅에 내려놓고 자신도 케이의 옆에 풀썩 앉았다. 왠지 모르게 이주알의 몸집이 전보다 조금 작아보였다.

“이 저주가 어떤 저주인지는 다음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 저주가 어떻게 재구성된 육체에 까지 따라붙었느냐다. 생로병사까지 초월한 저주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케이의 다리에 있던 저주는 조금씩 조금씩 형태도 뚜렷해지고 크기도 커지고 있었다.

“지옥 허공에 있는 영혼 입자들을 흡수해서 몸집을 키우고 있다. 증식형인가!”

케이는 다리에 있던 저주가 서서히 상체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요, 살아있을때는 다리만 못 움직였는데 지금은 몸 위로 올라오는 것 같은데요?”

이주알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저주는 맹렬한 기세로 부풀어 올랐다. 인큐버스는 약간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내가 자극한 것 같다. 실체를 드러내게 하자, 형태를 변형했어. 이건 진화형이다.”

보랏빛 저주는 순식간에 케이의 목까지 올라와서 케이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케이는 반듯한 자세로 바닥에 눕게 되었다. 인큐버스는 이주알에게 외쳤다.

“이러다 온몸으로 퍼지겠어!”

“호흡기까지 번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주알은 바닥에 놓여진 검을 다시 들고 일어서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방 천장에서 작은 빛줄기 하나가 떨어져 케이의 코와 입을 비추었다. 저주는 케이의 온몸을 둘러쌓다. 게다가 점점 짙어져서 짙은 보라색 덩어리에 케이의 코와 입만이 보이는 형상이었다.

저주는 빛줄기를 삼키려다 흩어지고를 반복하다가 소강상태에 놓였다. 인큐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이 된건가?”

저주는 약간 부글거리며 옅어지더니,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 형태도 안개같은 것에서 엎질러진 물같이 변했다.

“윽!”

“앗!”

이주알과 인큐버스는 각자 뒤로 물러섰다. 저주는 케이의 몸을 중심으로 방안을 단숨에 집어삼킬 맹렬한 기세로 퍼져나갔다. 인큐버스는 이주알의 몸을 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느새 이주알은 인큐버스보다 작아져 있었다.

“이럴수가……. 침식하고 있다.”

저주가 바닥과 벽에 닿자 뜨거운 용암에 닿은 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방 전체가 흐르는 촛농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말도 안 돼! 형체가 있는 물건에 영향을 주다니? 이건 저주의 영역을 넘어섰어!”

인큐버스는 애써 날개를 파닥였다. 방은 쪽빛으로 완전히 변해서 형체를 잃었다.

“안돼, 이대로는 방과 함께 바닥으로 처박힐 거야.”

“디딜 곳이 필요해. 더 이상의 비행은 무리야.”

인큐버스는 방문쪽으로 힘겹게 날아가 계단 난간에 내려 앉았다. 그러나 조금 쉴틈도 없이 인큐버스의 몸이 앞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설마, 계단까지?”

“윽! 떨어진다!”

계단은 인큐버스가 디뎠던 부분 주위로 뚝 끊켜서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떨어졌다.

제이가 눈을 떴을때, 제이는 거처의 침대로 옮겨져 있었다. 제이는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개운함을 느꼈다. 막 자고 일어났음에도 몸은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눈은 총명하게 떠지고 머릿속은 아주 깨끗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제이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신의 상체를 들여다 보았다. 제이의 몸은 놀라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복근은 선명하고 멋지게 자리잡고 있었고 가슴 근육이나 어깨 근육도 아름다울 정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상체 뿐만 아니라 하체도 등허리도 완벽했다. 아폴로의 세례를 받기 전에도 제이는 훌륭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다. 육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그 자체였다. 제이 자신도 잠시동안 몸을 보고 감상에 젖어 있었다.

“일어났나?”

제이는 반사적으로 이불로 몸을 덮었다. 이상하게도 변한 자신의 몸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치 아름다운 명화를 손에 넣어 자신만이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존재는 생김새가 독특했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큰 입과 하나의 작은 구멍만이 있었고,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여러개의 바퀴가 달려있었다. 몸통은 머리와 바퀴를 잇는 쇠 막대기가 전부였다.

“일어났으면 따라와라.”

이상하게 생긴 그 물체는 말을 마치고 방문을 나섰다. 제이는 허둥지둥 의복을 갖춰입고 물체를 따라나섰다. 물체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아주 재빠르게 거처를 빠져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제이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제이는 서서히 몸 상태가 적응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조절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었다.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체는 대로변에 다다르자 가공할만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퀴와 길바닥이 내는 마찰음이 귀를 찢는듯 날카롭게 울려펴졌다.

제이는 눈깜짝할 만한 사이에 시야에서 없어진 물체를 잠시 서서 바라보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제이의 귀로 알 수 없는 고음의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물체를 따라잡은 제이는 자신의 몸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다.

‘이건 참 대단하구나.’

제이는 올림푸스에 와서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체는 머리를 시종일관 이리저리 돌리면서 무언가를 찾아 헤메는 것 처럼 보였다. 이윽고 물체는 한 건물에 시선을 고정시키더니 급격히 한 쪽으로 선회하였다. 제이는 놀랍게도 물체가 선회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제이는 모든 만물이 지니고 있는 어떤 기운을 인지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올림푸스 치고는 허름한 궁전이었다. 여느 궁전처럼 화려한 장식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다른 궁전과는 달리 굉장히 노후한 느낌이었다. 어떤 장식은 산화되어 한 쪽 얼굴이 없거나 완전히 부서져서 형체를 알아보지 못 할 정도였다. 거기다 기둥 여기저기도 금이 가있었고, 대리석 바닥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처럼 엉망이었다. 올림푸스는 시간 관념이 사라질 정도로 모든 것이 새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 비해, 이 건물만 유독 세월의 흔적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궁전안에 천사도, 신도, 가구도, 심지어 올림푸스에서 그 흔한 멋진 의자들 조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궁전 안에는 창문에 비치는 햇살만이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쪽이다.”

물체는 머리를 두리번 거리다가 어딘가에 고정되어 천천히 나아갔다. 대리석 바닥으로 이루어진 넓은 홀을 가로질러서 바퀴자국이 거칠게 생겼다. 바닥 여기저기에 비슷한 자국들이 즐비했다. 물체는 홀 구석에 있는 나무문을 몸을 부딪혀서 열었다. 문이 열린 곳에는 캄캄한 어둠이 있었다. 물체는 어둠속으로 향하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이는 따라서 어둠속으로 천천히 발을 디뎠다. 제이가 발을 디디자,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제이임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판은 제이가 있던 곳 보다 조금 낮게 비스듬히 설치되어 있었으며, 놀랍게도 제이가 발을 딛자 서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앞에 보니 물체가 가만히 서 있었다. 움직이는 바닥 사이로 번쩍이는 스파크가 터졌다. 어두운 통로에는 군데군데 작은 불빛이 일렁였다.

바닥은 한참을 내려가다가 물체가 아래층에 도착하자, 한 번 멈추었다. 제이가 어리둥절 움직이자, 바닥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누군가 있는 것이 확인되면 스스로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제이도 아래층 바닥에 도착했다. 알 수 없는 냄새가 가득했다. 물체는 온데간데 없었고, 한쪽에 문이 조금열려 있고 밖으로 푸른 불빛이 새어나왔다. 조그맣게 폭발음도 들렸고, 불빛도 번쩍번쩍 거렸다. 제이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안은 놀라운 광경으로 가득찼다.

물체는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조정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제이의 거처까지 왔던 물체와는 매우 흡사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제이에게 온 물체는 바퀴가 좀더 크고 여러개였고, 큰 입이 없었으며 몸통에는 네 개의 집게손이 달려있었다. 물체는 집게손으로 한쪽에 있는 탁자에 있는 계기판을 조정하였다. 계기판에는 습도와 온도, 압력등을 조정할 수 있는 스위치들이 즐비했다. 물체가 한 스위치를 약간 내리자, 뒤편에 있는 유리병 안의 액체가 남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하며 작은 폭발음을 냈다. 물체는 뒤로 돌아서 유리병에 있는 액체를 옆의 파이프에 흘려 넣었다. 파이프는 보랏빛으로 빛나며 온 방안을 휘감았다.

이윽고 액체는 문밖으로 나가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제이는 무의식적으로 그 액체를 따라 안쪽에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안쪽 방문을 손으로 밀어 열자 큰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방이 나타났다. 벽 뒤로는 갑옷과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보랏빛 액체는 제이의 맞은편에 있는 갑옷으로 흘러들어갔다. 갑옷은 보랏빛으로 크게 번쩍이더니, 사그러들었다. 갑옷은 어딘가 모르게 보랏빛을 띄게 되었다.

제이는 전시되어 있는 무기들을 바라보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검과 갑옷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어울리지 않게 허름하고 다 부서진 물건들도 있었으며, 아주 드물게 어두운 기운을 띄는 무기들도 있었다. 제이는 잠시 그 위용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무기들은 제이에게 너나할것 없이 자신들을 사용해달라고 외치는 듯 했다.

“안타까운 일이지.”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제이는 화들짝 놀랐다. 제이가 정신을 빼앗기고 무기를 처다보았다고는 해도, 낯선곳에 온 만큼 무슨일이 있어도 즉각 반응할 수 있도록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이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헤파이스토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우스의 궁전에서 본 헤파이스토스였다. 그러나 무엇인가 이상했다.

“아니……?”

헤파이스토스는 그대로였다. 다시 말해, 제우스의 궁전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바퀴의자에 앉아서 세월을 몸으로 다 받아들인 늙은 모습에 하얀 머리카락은 벗겨지고 뒷부분만 남아 어깨 밑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굴이었다. 얼굴은 노화로 인해 피부가 전부 늘어졌으며 보기 싫은 검버섯도 잔뜩이었다. 조금 벌어진 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신이라고 하기엔 나의 몰골이 너무나도 볼품이 없나?”

그말 그대로였다. 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라. 여기 네게 보여지는 나는 내가 아니다.”

헤파이스토스는 바퀴의자를 돌려 한 쪽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한 곳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지만, 내가 아니지. 무슨말인지 모르겠지?”

제이는 조심스럽게 헤파이스토스를 따라나섰다. 헤파이스토스는 구석에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매우 좁았으며, 어두웠다. 한 쪽에 희미한 분홍 불빛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타원형 관이 시선을 끌었다. 그안에 있는 것은 뇌였다.

“저것이 나다.”

제이는 헤파이스토스 형상을 하고 있는 물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 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껍데기. 방부제 처리를 잔뜩해서 썩지 않는 몸이다.”

헤파이스토스의 몸은 빙글 돌아 제이를 마주보았다.

“다시 말해 시체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신도…….’

“죽냐고? 물론이지.”

제이는 놀라서 처다보았다. 헤파이스토스의 시체는 제이를 지나쳐 다시 무기들이 가득한 방으로 나왔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말그대로 불사신이라면,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겠어?”

헤파이스토스의 시체는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후에 제이를 찾아왔던 물체들이 방안으로 들어와서 이것 저것 조절하기 시작했다.

“신도 나이가 들면 죽어.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이 흘러야만 하지. 물론 각각의 신들이 가진 수명은 다르다. 내가 아버지인 제우스님보다 먼저 죽은 이유는 그 때문이지.”

“하지만, 헤파이스토스님은 살아가고 계시잖아요.”

“후후, 이런 모습이라도 말이지?”

헤파이스토스는 웃었지만 시체는 무표정이었다.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나의 뇌도 기능을 멈추었다. 저 안에 있던 기계가 뇌안에 있던 기억을 읽어내서 전송하는 것 뿐. 내가 새로운 무기를 만들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제이는 무심코 헤파이스토스의 뇌가 있던 방을 바라보았다. 방안에는 잘은 안보이지만 또 하나의 문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문은 열리지 않아.”

제이는 헤파이스토스를 돌아보았다.

“그 문안에 있는 것은 내가 죽기 전에 만들던 신무기. 이제는 죽어버려서 영원히 완성되지 못하는 비운의 무기다. 그리고…….”

제이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받았다.

“최강의 무기지.”

제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를 부른 이유는 네게 맞는 무기들을 장비시키기 위함이다. 여기 있는 무기중에 네게 맞는 무기들을 골라봐야 겠다.”

손이 달린 물체가 나타나 버튼 하나를 눌렀다. 무기들을 가리고 있던 유리벽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제이는 몸을 움찔했다. 무기들이 뿜고 있는 기운이 온 방안을 휩쓸었다.

“이 병기들은 모조리 마법에 걸려있다. 강력한 마법들을 매일 주입했지. 너, 아폴로님에게 힘을 받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이 자리에서 가루가 됬을 거다. 맨몸에 인간들은 이런 단순한 마법들조차 견디기 힘들지.”

실제로 제이는 숨쉬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기운에 짓눌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 질거다. 마법이란건 그런거니까. 자, 어디부터 시작할까? 작업을 하려면 언제나 큼직한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손이 달린 물체는 한쪽으로 움직여서 갑옷 하나를 꺼내왔다. 소매가 없고 골반쪽까지 내려오는 메인 갑주 안쪽에 입는 속갑옷이었다.

“넌 이후로도 수련을 해야하는 몸이니, 일단은 움직이기 쉬운 속갑옷만 착용하도록 해. 메인 갑주는 너무 무거워서 지금은 입으면 옴짝달싹 못할거다.”

제이는 시선을 무기들 정중앙에 있는 메인 갑주로 향했다. 메인 갑주는 크기만 클뿐이 아니라 푸른 빛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고, 아주 작은 부분에 까지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 있었다.

‘저걸 입고 싸우라는건가? 아까워서 어디에 부딪히지도 못하겠네…….’

“착용해봐.”

헤파이스토스가 재촉했다. 제이는 갑옷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느낌이 제이의 손에 전달되었고 알 수 없는 기운도 전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제이는 갑옷을 들고 자신의 몸에 대며 크기가 맞는지 확인했다.

“걱정하지말고 일단 입어봐.”

제이는 계속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단숨에 맞추는 헤파이스토스가 조금은 불쾌해지기시작했다. 거기다 속갑옷은 아무리 봐도 제이에게는 한참 작은 크기였다. 제이가 약간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속갑옷을 가슴에 대고 걸쳤다. 속갑옷은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제이의 가슴에 맞는 크기로 커지고 분홍빛이 제이의 몸을 감싸더니 자동으로 제이의 몸에 딱맞게 착용되었다.

“벗으려고 생각만 하면 벗어진다.”

제이는 또 자신의 생각을 읽어버린 헤파이스토스를 노려보았다. 갑옷은 제이가 손에 들고 있었을때는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했지만, 착용을 하고 나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 처럼 가벼웠다. 갑옷에서 새어나오는 분홍빛은 어깨부분에서 시작해 서서히 제이의 온몸을 휘감았다. 분홍빛이 지나가는 부분마다 제이는 강한 힘이 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머지 장구류는 지금 줘봤자 훈련할 때, 불편하기만 할 테니 내가 맞는 것을 골라놓지.”

본적이 없는 물체가 어디선가 나타났다. 물체는 집게손 대신 넓적한 사각형의 기계를 손위치에 장착하고 있었다. 물체가 기계를 제이의 머리에 조준했다. 제이는 위협을 느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걱정마. 스캔일 뿐이니까.”

기계는 붉은색으로 달아오르더니 넓은 파장을 일으켰다. 파장은 제이의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를 훑었다.

“이제 네 정보가 입력되었다. 수행을 마치면 장구류를 받으러 와라. 다음은 무기다.”

집게손을 가진 물체가 버튼을 누르자, 갑옷이나 투구들 밑에 있던 불빛은 꺼지고 무기들 만이 번쩍였다.

“이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라.”

제이는 무기들을 둘러보았다. 롱소드, 바스타드 소드, 투핸디드 소드, 스피어, 헬버드, 랜스등 날이 있는 무기들 뿐 아니라, 메이스, 플레일, 클럽등 둔기종류도 가득했다. 하나같이 수상한 기운들로 감싸져 있었다. 그러나 제이는 다른 곳에 시선을 향했다.

“이것은……?”

제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색으로 주둥이가 길고 황금색 알들이 몸체에 주렁주렁 메달려 있는 생전 처음 보는 물체가 있었다.

“개틀링 건이다. 처음보겠군.”

제이는 게틀링 건을 손에 쥐었다. 생긴것에 비해 가볍게 느껴졌다. 몸체 중앙에 누를 수 있는 방아쇠가 보였다. 제이는 호기심에 잠깐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투투투투투투투 콰광!’

게틀링 건에서 순식간에 초당 이천발 이상의 황금탄환이 발사되었다. 제이는 탄환이 발사되는 순간 총을 놓치고 몸을 숙였기 때문에, 탄환이 발사되는 동안 게틀링 건은 혼자서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았다. 덕분에 탄환은 방 여기저기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무기 사용법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만지다니!”

헤파이스토스는 소리쳤다. 제이는 미안한 마음에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데 구멍난 벽 뒤로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건 내가 맡지.”

손은 제이를 낚아채서 벽으로 끌어당겼다. 벽은 박살이 났고, 제이는 손의 주인과 함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지하실이……! 아테나!”

헤파이스토스의 절규가 제이와 아테나가 사라진 곳을 향해 메아리쳤다.

“도착.”

아테나는 잡고 있던 제이의 손목을 휙 하고 집어던졌다. 제이는 벌판에 내동댕이 쳐졌다. 제이는 손목을 만지작 거리며 힘겹게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황량한 황무지였다.

‘올림푸스에 이런곳이?’

“시간 없어. 총 들어.”

아테나는 허리춤에 끼고 있던 권총을 집어던졌다. 제이는 권총을 물끄럼이 바라보곤 아테나를 보았다. 아테나는 허리에는 여러개의 검과 총을 차고 있었고, 등에도 긴 도검과, 활과 기관총들을 메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 허벅지에도 날카롭고 작은 암수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양 어깨에 매달려있는 상식을 초월하는 크기의 전함에나 달려있을 만한 함포였다.

“총.”

아테나는 다시 한 번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제이는 조심스럽게 권총을 손에 들었다.

‘탕!’

제이는 순간 아테나가 손에 든 권총으로 제이를 겨누고 망설임 없이 발사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반신의 경지에 오른 제이는 집중해서 그 순간이 시간이 멈추는처럼 보이게 했다. 아테나의 손가락이 서서히 방아쇠를 당겼고, 총신은 불을 뿜었다. 총알은 천천히 회전하며 총신에서 빠져나와, 파도를 치는 것처럼 물결치며 제이의 이마 한가운데를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제이는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피하라는 명령을 온몸에 내렸지만, 제이의 뇌세포에서 내린 결단이 몸 여기저기에 퍼지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허억, 허억.”

제이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초인적인 집중력과 반사신경을 이용한 때문인지, 제이의 온몸에는 땀이 흘렀다.

“간신히 피했잖아요! 이게 뭐하는…….”

제이는 자신의 오른쪽 눈과 입술로 흐르는 피 때문에 말을 멈추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쏴 봐.”

아테나는 무릎꿇고 있는 제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제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무기인데, 한 번 쏘는 것을 보고 해보라고? 그런일이 가능할 리가…….’

제이는 무심코 권총을 바라보고는 생각을 멈추었다. 제이의 머릿속에 아테나가 발사한 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원리를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제이는 권총을 손에 쥐고 노리쇠를 뒤로 힘껏 당겼다. 권총은 철컥소리를 내며 장전되었다.

“어디다 쏠까요?”

제이가 아테나에게 묻자, 아테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아테나님을? 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제이가 외치자 아테나는 늘어뜨렸던 권총을 제이를 향해 겨누었다.

“안 쏘면 죽어.”

제이가 당황하자, 아테나는 두 번째 발사를 감행했다. 제이는 이번에는 한쪽으로 완벽하게 피해냈다.

“두 번 당하지는…….”

아테나의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탄환이 피한 제이를 향해 날아왔다. 제이는 혼비백산 하여 간신히 그 총알들을 피했다. 그러나 연이은 총탄이 제이가 피하는 곳마다 날아왔다. 제이는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전에 있던 위치의 제이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을 정도였다. 아테나는 총 열 한발을 갈기고서는 잠잠해졌다.

“쏘지 않으면 죽어.”

아테나는 조용히 탄창을 갈아끼우고 있었다. 제이는 헐떡거리는 숨을 부여잡고 총을 겨눠 아테나를 쏘았다. 아테나는 탄창을 다 갈아끼우고는 손을 번개같이 움직여서 총알을 이마 앞에서 붙잡았다.

“조준 합격. 다음.”

아테나는 어깨에 둘러 메었던 라이플을 집어던졌다. 같은 종류를 하나 더 꺼내 제이를 겨냥했다. 제이의 감각은 매우 곤두서 있어서 방심따위는 하지 않았다.

‘탕’

제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권총과는 비교가 안되는 파워와 스피드였다. 제이는 이번에는 바로 라이플을 집어들어 아테나를 겨냥했다. 그러나 권총과는 달리 조준하기가 어려웠다.

“가늠쇠와 가늠좌를 일자로 놔서 동심원을 최대한 깔끔한 원으로 만든다.”

제이는 라이플을 들고 가늠자를 가늠쇠와 일직선으로 놓고 바라보았다. 구멍안으로 작은 원 안에 가늠쇠가 정중앙에 놓여졌다.

“목표. 중앙에 놓고 방아쇠.”

제이는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아테나는 아까보다 훨씬 빠른 동작으로 이마 앞에서 총알을 잡았다.

“합격. 다음.”

제이는 그 후로도 한참을 개틀링 건, 기관 단총, 고속 유탄발사기, 대전차포, 무반동총 등 각종 총포류를 시험받아 모두 합격했다. 제이는 이제 총포류의 조준방법과 작동방식의 기본을 완전히 익혀서 처음보는 총포류도 한 번 만져보고는 바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음은 검.”

제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테나는 검을 던지려다 말고 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어깨에 있는건 안하나요?”

아테나는 자신의 어깨에 매달린 집채만한 함포를 잠시 바라보고는 어깨에 둘러맨 함포를 제이의 앞에 집어던졌다. 그 엄청난 무게에 황무지 바닥이 함포 모양으로 깊게 파였다.

“조준 필요없어.”

제이가 함포를 힘겹게 들어서 둘러 메었다.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렸다.

「새로운 사용자 정보를 확인합니다」

제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들리는 곳은 찾지 못했다.

「목표 확인합니다」

하늘로 곧게 서 있던 함포가 기계소리를 내며 앞을 향해 쿵하고 내려왔다. 제이는 무게에 짓눌려서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 제이가 디디고 있던 땅은 푹 하고 꺼졌다.

「발포」

함포는 자동으로 아테나를 향했다. 포신이 번쩍이고 적색 빛이 아테나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사되었다. 황무지에 도착한 이후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던 아테나는 놀랄만한 반응을 보이며 옆으로 굴러 피했다. 아테나가 있었던 자리에는 그야말로 대폭발이 일어났다. 제이는 폭발의 후폭풍 때문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목표 생존, 제 2발째 발포합니다」

제이는 목소리가 들리자 허둥대며 외쳤다.

“잠깐! 그만! 쏘지마!”

「작동 중지 대기」

함포는 포신을 빨갛게 달구다가 멈추었다. 폭염이 가신 자리는 어마어마한 구덩이가 생겼다.

“인공지능.”

제이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가를 생각하고 있는 도중에 아테나의 중얼거림을 듣자, 신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생각을 잘도 읽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제이가 어깨에서 포신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아테나가 중얼거렸다.

“됐어.”

제이가 멍하니 있자, 아테나가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이미, 너. 인식했어. 못 바꿔.”

아테나는 몸을 뒹굴어서 먼지가 묻은 무기들을 정비했다.

“비행. 연습해.”

“비행?”

제이는 중얼거리고는 아차 싶었다.

「비행」

제이의 등뒤로 커다란 기계가 철컥하고 내려왔다. 포신과 연결된 배낭처럼 생긴 기계에서 불꽃이 점화되었다.

‘쿠와아아앙’

제이는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순식간에 하늘의 점으로 보일정도로 사라졌다.

“검술. 해야 해. 거기 서.”

아테나는 돌진을 앞두는 고양이 처럼 다리를 굽히고 힘을 모았다. 아테나의 허벅지 근육이 불끈불끈 솟았다. 아테나는 즉시 지면을 박차고 제이가 날아간 곳으로 뛰어 올랐다. 제이는 강력한 반동 때문에 하늘에서 균형을 잃고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제기랄, 너무 빨라서 감당이 안되잖아! 조금만 속도를 줄일 수 있다면…….’

제이는 무언가 떠올리곤 어마어마한 중력의 고통 속에서 힘겹게 말했다.

“처, 천천히.”

「저속 비행」

불을 뿜던 포신은 즉시 발화를 멈추었다. 불꽃은 사그라들어 자그만 횃불정도의 크기로 변해서 제이가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내뿜었다. 제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아테나가 밑에서 솟아 올라왔다.

“피해.”

아테나는 등 뒤에서 아테나의 키보다 더 큰 도검을 꺼내서 제이를 크게 베었다. 도검은 제이의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도 그림자도 보지 못할 속도로 제이를 향해 날아왔다.

인큐버스는 계단이 무너져 떨어질때 보다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주알을 잡고 있던 팔은 맹금류의 발톱으로 변했으며, 박쥐의 형상을 하고 있던 날개는 큼직한 깃털로 뒤덮인 흑빛의 매의 날개로 변해있었다.

“이 상태는 정말 오랜만이군.”

인큐버스의 몸집이 커졌기 때문에 작아진 이주알의 모습이 한층 더 조그맣게 보였다.

“……. 일단 ‘바닥’ 으로 내려가자. 너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진 않겠지?”

“엄청 지치게 된단 말씀이지.”

인큐버스는 날개를 펄럭이며 더 아래쪽으로 향하여 날기 시작했다.

“방이 없어져서 어떡하지 이주알?”

인큐버스는 어린 아기를 어르듯 장난끼 가득히 이주알에게 물었다.

“그 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언의 아이의 생존여부다. 살아만 있다면 좋겠는데.”

인큐버스는 하얀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귀옆에 있던 붉은 머리카락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일이 없더라도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즉사야. 알면서 그래?”

“큭, 육체를 주지만 않았더라도 살아 있을텐데.”

이주알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에 큰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리 안나게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바닥’ 이라, 생각해 보니 참 오랜만이네.”

인큐버스는 이유 없이 서두르고 있었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인큐버스 자신이 펄럭인 날개의 바람이 바닥에 부딪혀 다시 올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다 왔어. 이주알.”

인큐버스는 이주알을 살짝 놓았다. 이주알은 들고 있던 큰 칼을 바닥에 꼽고 안정적으로 착지 했다. 이주알은 끼고 있던 투구와 갑옷과 검이 너무나 커져서 어린아이가 어른의 무기를 들고 있는 우스운 모습이 되었다. 인큐버스는 이주알을 내려놓고 크게 날개를 펄럭여 잠깐 하늘로 솟았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날개는 다시 박쥐모양으로 바뀌었고 귀 밑의 새빨간색의 머리카락도 반짝거리며 다시 생겼다.

“하아, 역시 엄청 지치네.”

인큐버스는 뒷목을 움켜쥐고 투덜거렸다. 둘은 자신들이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저주에 대해 암묵적으로 언급을 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이주알. 아까 그 저주말이야.”

인큐버스가 용기를 냈다.

“내 생각에는 아무리 봐도 저주가 아닌 것 같단 말야.”

이주알은 땅에 단단히 박힌 칼을 단숨에 뽑아내었다. 몸집은 작아졌지만 완력은 그대로였다.

“저주라는 것은 사념체. 형체가 있는 계단이나 돌바닥을 녹인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럼 그게 대체 뭐야?”

“저주다.”

이주알은 의미심장하게 내뱉었다. 인큐버스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저주 말고는 그런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건 없지. 우리가 알 지 못하는 저주인 것이다.”

“네가 모르는 저주라니?”

인큐버스에겐 이주알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항상 자신의 방에서 힘에 대한 책만을 독파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나서는 이주알이 강력한 힘을 지닌 저주를 모른다는 것이 의아했다.

“저주의 정체만큼이나 의문스러운 것이 새로 구성된 육체에게 무슨수로 저주가 걸릴 수 있냐는 것이다. 탄생할 때 모체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도, 새로 건네받은 육체는 그것과는 별개. 순도 백퍼센트의 깨끗한 육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울 수 있는 가설은 한가지 밖에 없다.”

이주알은 말을 하면서도 무엇인가를 바닥에서 계속해서 찾아 헤매고 있었다. 케이의 영혼의 흔적을 찾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그게 뭔데?”

“영혼에 걸린 저주다.”

인큐버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무슨소리를 하나 했네. 그렇게 간단한 걸 뭘 그리 심각하게 말하고 있어?”

이주알은 계속해서 영혼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하데스에게 제적을 당했다는 것은 영혼까지 정화되었다는 의미다.”

인큐버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야, 그럼 다시 원점이잖아. 깨끗하게 빨린 영혼과 육체에 무슨수로 전에 있던 저주가 돌아와 앉은거야?”

“그것은 아마……. 세대를 건너온 저주.”

이주알답지 않게 애매모호한 결론이었다.

“이 전 생애에서 걸려온 저주, 혹은 그 이전…….”

“그 전? 윤회하기도 전에 저주에 걸렸단 소린가.”

이주알은 갑작스레 감지를 멈추었다.

“뭐,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콰앙!’

한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이주알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검을 들고 소리가 난 쪽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인큐버스는 뒤쪽에서 들려온 폭음에 화들짝 놀라 빠르게 이주알 옆으로 이동했다.

“이건, 안좋은데…….”

인큐버스가 나지막히 말했다. 폭음뒤에 나타난 흙먼지 뒤로 남색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하하하!”

케이가 남색 저주들에 감싸져서 나타났다. 그리고는 두 다리로 똑바로 걸어서 인큐버스와 이주알을 향했다.

“기분이 상쾌하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인큐버스는 전에 없는 불길함이 들었다. 남색 저주는 케이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고 있는 듯 했다. 바닥을 녹이지는 않았으나 언제든지 녹일 수 있는 듯이 넘실되고 있었고, 전처럼 범람해서 아무곳이나 덮치지 않고 서로 뭉쳐가며 힘을 비축하는 듯이 보였다.

“조심해라, 인큐버스.”

이주알이 말하지 않아도 인큐버스는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완벽한 전투태세에 들어서 있었다.

“이주알, 모습이 우습군. 어떻게 된거지? 젊어지는 샘물이라도 마신건가?”

케이가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케이의 붉은 머리칼이 타는듯이 빨갛게 보였다.

“네게 말해줄 필요는 없다.”

케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해줄 기분이 들게 해주지.”

케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주알은 순간 긴장했다. 케이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무엇인가 움켜 쥔 모습을 하고는 그대로 이주알에게 집어 던졌다. 케이의 근처에 있던 남색 덩어리가 조금 떼어져서 이주알에게 날아왔다. 이주알은 칼을 두손으로 쥐고 맹렬히 덩어리를 향해 휘둘렀다. 덩어리는 두부 잘리듯이 깨끗하게 잘렸다.

‘물리적으로 피해를 주니까 물리적으로 공격도 가능한 건가!’

인큐버스가 깨닫자 마자 소리쳤다.

“이주알!”

두 동강 났던 덩어리는 뒤로 날아가지 않고 멈추었다가 양 옆으로 이주알을 덮쳤다. 이주알은 급하게 칼을 바닥에 꽂고 아주 민첩하게 그 위로 물구나무 섰다. 덩어리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서로에게 부딪혔다. 두 개로 나뉘어졌던 덩어리는 부딪히면서 다시 하나가 되었고 꽂혀 있던 칼 모양에 따라 둥글게 넘실거렸다. 이주알은 그 위에 한 손으로 위태롭게 거꾸로 지탱하고 있었다. 케이는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이건!”

남색 덩어리는 케이의 손가락 소리에 맞춰 부글부글 끓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케이는 폭발의 순간에 한쪽으로 달아나는 이주알의 그림자를 포착했다.

“재빠르기도 하지.”

케이는 이주알이 달아나는 곳으로 덩어리 여러개를 동시에 집어던졌다. 이주알은 아주 빠르게 그 덩어리들을 모두 피해냈다. 그러나 모습은 몹시 지쳐보였다.

“어디까지 피하는지 볼까?”

케이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덩어리 여러개를 집어 던지고는 이주알이 달아날 때쯤 폭발시켜서 이주알이 가는 길목을 폭발로 막았다.

“큭!”

이주알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궁지에 몰렸다. 주변은 남색 덩어리로 가득찼다.

‘젠장, 적어도 몸을 회복시킬 시간이라도 있다면…….’

“끝이다. 죽지는 않을려나? 모르겠네.”

케이가 히히덕거리며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요란한 폭발음과 폭염이 주위를 메웠다. 케이는 킬킬거리다가 순간 웃음을 멈추었다.

“몽마.”

케이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인큐버스가 케이의 바로 뒤에서 손으로 케이의 목을 긋는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케이는 재빨리 인큐버스를 발로 차며 반동으로 저만치 피했다. 인큐버스는 약간 밀려났을 뿐 아무런 데미지도 입지 않아보였다. 인큐버스는 바닥으로 내려왔을때 처럼 형태가 변해있었다. 붉은색 귀밑머리도 사라져 있었다.

“날쌘걸? 다리는 이제 괜찮나 보지?”

케이가 입만으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케이의 다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지만 남색 저주덩어리가 움직일 수 있도록 조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케이는 어쩐지 그것이 본래 다리를 움직인 요령인양 본능적으로 아주 수월히 해낼 수 있었다.

‘이주알은…….’

케이는 이주알쪽을 바라보았지만 아직도 폭염이 자욱해서 상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녀석이 먼저다!’

케이는 한 손을 들어올려 힘을 모았다. 남색 저주덩어리가 모여서 응어리졌다. 크기는 케이의 앉은키 정도였으나 밀도가 대단했다.

“소용없다. 내겐 통하지 않아.”

인큐버스가 날개를 펄럭이며 조금 날아올랐다.

‘모습을 보니, 비행하며 공격을 피할 셈인가.’

“해봐야 알지.”

케이는 손에 담긴 커다란 남색구를 인큐버스를 향해 집어던졌다. 남색구는 날아가면서도 케이의 주위의 남색 덩어리들을 조금씩 흡수해서 인큐버스에게 도착할 때 쯤엔 크기가 한층 더 커져 있었다. 인큐버스는 날개를 펄럭여 조금더 위로 날아 구체를 사뿐히 피해냈다.

“하하하! 그리로 피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구체는 인큐버스를 지나쳤다가 멈추어 다시 인큐버스를 향해 유도탄처럼 돌아왔다.

‘손을 떠난 후에도 조절 가능한 모양이군. 하긴, 그건 이주알이 반으로 잘랐던 것이 도로 뭉쳐진 것으로 이미 확인이 끝난 사실이었나. 뭐, 이젠 상관없겠지.’

구체는 인큐버스를 직격,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됬다! 이걸로 치명상은 확정이다. 하다 못해 날지는 못하게 되었겠지!’

폭염이 걷히고 케이는 바닥을 살펴보았으나 인큐버스는 없었다.

‘아직도 날 수 있었나! 얕보았군.’

케이가 하늘을 바라보자 놀랍게도 인큐버스는 폭발이 일어나기 전과 전혀 다름없는 상태로 유유히 공중을 부양하고 있었다.

‘아니?! 직격이었을텐데!’

“말했지? 내겐 소용없다고.”

‘화력이 약했나? 그럴 리가……. 아냐, 그렇다 하더라도 상처 하나 없을 수는 없어! 게다가 먼지조차 뒤집어 쓰지 않다니. 그렇수가 있는건가?’

케이는 문득 이주알을 공격한 직후 인큐버스가 했던 일련의 동작들을 떠올렸다.

‘그때 무슨짓을 한거로군. 뭐지? 뭘 당한거지?’

폭염이 걷히고 이주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기와 재를 몽땅 뒤집어 쓴 이주알은 몰골이 아주 형편없었다.

“큭.”

이주알은 비틀거리며 걸어와 풀썩 주저앉았다.

“위력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군. 처음부터 진심으로 나왔다면 어떻게 됬을지…….”

인큐버스가 조용히 이주알 곁으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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